때가 되니 많은 부녀자들이 역에 나와서 주먹밥을 건네준다.
기차는 멈추고 물도 여기서 얻어 마신다. 열차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달린다. 지나는 길에는 전에 북진할 때 인민군을 좇아 싸우던 곳이 스쳐 지나서 감회 새롭다. 우리는 평북 개천(介川) 역에서 점심을 먹고 하차했다. 나도 여기서 용변을 보고 돌아서는데 한쪽 발이 그만 질퍽한 오물을 밟고야 말았다. 냄새가 고약했다. 그 신발을 벗어던지고 깨금발로 뛰면서 승차했다.
이곳 개천은 북진할 때 후퇴 전진 몇 번 오고 간 곳이라 기억이 더 선명하다.
개천(介川)이라는 지명처럼 오물을 밟은 신발이여, 공산주의여. 깨끗이 씻겨나가라. 한쪽만 남은 신발을 신고 이틀 정도의 여행 끝에 개성에 도착했다.
임시수용시설을 갖춘 어느 국민학교에 수용되었고 같은 처지의 더 많은 인원이 집합해서 교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오니 대우가 좋았다. 하루 세끼 메뉴도 다양하고 밤에는 교정에서 각종 영화 상영으로 시간을 보내게 했다. 영화라야 별것이 아니고 그들의 혁명투쟁 활약상이다.
한쪽밖에 없는 신발과 맨발로 닷새를 머물며 엉거주춤 돌아다녀서 내 나무 침대는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하루는 옆의 친구가 조명탄이 떨어질 때 조명 시간을 오래 가게 하기 위해 조명탄 위에는 낙하산이 펴진다고 한다. 조명탄의 기름이 다 타고나면 이 낙하산은 바람 따라 날아가다 땅에 떨어진다. 이 낙하산의 손수건만 한 조각을 구해 와서는 태극기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나는 선뜻 동의하고 제작에 들어갔다.
물감은 없다. 검은색은 취사장 아궁이에서 타고 남은 숯을 쓰고, 붉은색은 성냥 알을 으깨 쓰기로 하고 시험해 보니 색깔이 완전하지는 않으나 그런대로 나온다. 하루 걸려 제작에 성공했으나 보관해서 갈 길이 없다. 교환 장소로 갈 때는 검색이 심할 것이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좋은 생각이 반짝 떠오른다. 세숫비누 한쪽 속을 파내고 그 속에 태극기를 넣고 파낸 비누 조각을 다시 땜질을 해서 물에 담가 두니 비누가 퉁퉁 불어 감쪽같다.
이것을 시험이라도 할 겸 수돗가로 갔다.
마침 인민군 병사가 비누 좀 쓰자는 것이다.
“예, 쓰시오.”하니 그는 냉큼 받아서 자기 손에 대고 문지른다.
이상한 감도 없이 쓰고는 건네준다. 성공이다.
닷새째 되는 날 우리들은 아침 일찍 목욕을 하고 입던 옷은 모두 그 자리에 벗어놓고 알몸으로 나오자 준비해둔 새 옷을 한 벌씩 준다. 모자 의복 신발과 위문품 주머니까지 샅샅이 검색하고는 순서대로 승차시킨다. 군용 짐차에 스무 명씩 태우고는 판문점을 향한다.
얼마간 달려가니 큰 도로가 나오고 오고 가는 차량이 많다. 짐차 위에 포장을 덮어 씌운 터라 잘 보이지는 않으나 빈틈으로 내다보니 도로 폭이 넓고 이북 포로병들이 이미 교환되어 북으로 실려 가는데 모두 옷을 홀랑 벗고 속옷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차도 판문점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우리 국군과 미군, 인민군 장교의 입회하에 미군 장교가 한국말로 호명하는 대로 하차해서 아군 차에 승차시킨다. 내 이름도 정확하게 부른다. 나도 하차해서 아군 차에 승차하니 차는 자리가 만원이라 이내 출발한다. 그리고는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들을 하차시킨다.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린 국군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하고 애국가가 봉창된다. 우리도 모두 오늘 아침에 입고 온 새 옷을 벗어던지고 속옷만 입고 서서, 나는 개성에서 제작해온 태극기를 비누에서 꺼내 들고 ‘애국가’ 봉창을 함께 한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고는 모두 목이 메어 애국가 대신 울음바다로 변한다.
너무도 감격했고, 몇십 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껏 소리 내어 불러보는 애국가!
그 순간의 그 감격, 어찌 글로써 다 표현하겠나.
연주가 끝나고 옆자리로 가니 거기에는 군데군데 탁자가 놓여있고 샤워실로 안내한다.
시원한 물줄기가 내리 꽂힌다.
30개월 즉 2년 6개월 만에 더러운 공산주의의 악랄한 티끌을 깨끗이 씻어내니 정말로 시원하다. 출구로 나오니 새 군복이 지급된다. 그 옷을 입고 나니 소속 군번, 성명, 계급을 묻고는 명찰이 작성되었다. 가슴에 달고 안내에 따라 야외 식당으로 갔다. 천막 속에서 지급되는 점심 식사는 돼지고기 볶음밥이었다. 배고픔도 잊고 멍하니 앉아 있는다.
하늘을 쳐다본다. 정말 저 하늘이 대한민국의 하늘이며 이 자리가 정말 대한민국의 땅이더냐. 흥분된 마음을 정리해본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는 오늘 아침 개성을 출발, 그 후의 절차 따라 이곳에 앉아있기까지의 여정을 단추를 채우듯 끼워 맞춰 본다.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와 밥을 먹는다. 밥맛이 없다.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붕 떠있는 기분이다. 주위에서는 주소를 묻고 집에 연락하라고 재촉하지만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식사가 끝나자 역으로 간다. 문산역으로 기억된다.
나는 생전 처음 타보는 객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한다.
지나는 곳마다 농민들은 농토에서, 주민들은 거리에서 손을 흔들고 반겨준다. 이 객차에는 죽을 고생하다 휴전으로 교환되어 귀국하는 포로들이 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서울역에 도착했다.
집결지인 인천항으로 가기 위해 이 열차는 서울역을 경유 인천역으로 수없이 오갈 것이다. 그때마다 열차에 내 자식 내 남편 내 형제가 돌아오는가 싶어 어깨띠를 두르거나 팻말에 주소 성명을 크게 써서 들고 이 객차 저 객차 돌아다니면서 그 이름 울부짖는 광경은 애처롭기만 하다.
나도 여기서 내 부모 형제 상봉하고 싶지만 내 태어난 고향은 아득히 멀기만 하여 그리움을 꾹 눌러 참는다. 다행히도 내가 타고 온 열차에서 상면의 감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열차는 잠시 멈추어 상면의 기쁨 만끽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곧 떠나 인천역에 도착하였다. 여기도 서울역과 마찬가지로 온통 난리통이다.
우리들은 하차해서 집결지인 어느 국민학교로 향했다. 이곳은 임시 집결지로 수송선의 인원이 차면 떠난다. 이틀간의 휴식을 취한 뒤 인천부두로 갔다.
거기 큰 화물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승선해서 배 밑창으로 내려가니 화물선을 내부 개조하여 임시 수송선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칸막이를 해놓아서 제법 많은 인원이 탈 수 있었다. 내가 탄 배에도 수백 명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처음 타보는 배에 몸을 맡기니 파도에 밀려가는 듯 몸이 높이 솟구쳤다가 아래로 수십 길 빠져 내려가는 듯 울렁울렁하다. 이 배의 도착지는 거제도,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던 곳이라 한다. 그들도 제 고향 찾아 이북으로 갔으니 수용시설이 텅 비어 있을 것이다.
그 자리로 우리가 가고 있다.
그러니까 인천에서 부산 앞바다로 가는 것이다. 배의 항로는 제법 먼 거리다.
서해는 작고 큰 섬이 둥둥 떠있는 곳이라 동해 곁에서 자란 나는 구경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배 밑창에서 올라와 갑판 위로 향하는데 승무원이 제지한다.
이상하다. 왜 이럴까.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에는 자유롭게 허용했으나 여기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원인인즉 이북에 있을 때 동료들에게 악질적 행위를 해서 미움을 받은 자, 반미구국투쟁 조직원으로 정신적 육체적 압박을 가하던 위원장, 그 이하 간부직이 함께 한배에 타고 귀환하다 보니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갑판 위로 끌고 와서는 그대로 바다로 던져 죽게 한 사고가 발생한 뒤로는 일체 출입을 통제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배 밑창에서 도착지까지 꼼짝 못 하고 갇혀 있어야만 했다.
배가 몹시 흔들린다. 멀미가 난다.
가만히 누워 이리 둥글 저리 둥글 배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겨둔다. 도중에 배는 운항을 포기하고 하룻밤을 쉬었다. 낙동강 하구 부근 파도가 드세어서 항해를 못 하고 쉰다는 것이다. 그 익일 배는 다시 항해를 계속해서 가닿은 곳이 용초도(龍草島)라는 작은 섬이다. 여기도 섬 전체가 수용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곳이 바로 휴전협정으로 귀환되는 남한의 전체 포로가 임시 수용되는 곳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