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열차 짐칸에 서러운 한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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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저녁 무렵 골짜기 수용소에서는 환호의 함성이 메아리치고 춤을 추듯 기쁘게 날뛰는 사람들로 잔치가 벌어졌다. 국제 적십자사 위문단에서 준 위문품 때문이다. 그들은 이북 깊숙이 자리 잡은 시중 땅 압록강은 불과 80리 정도 두고 있는 이곳까지 전쟁 와중에도 국제법의 보호하에 무사히 다녀갔다.


우리도 법이 허용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그들과 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이 고생, 저 고생 다하면서도 한 발짝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법이란 얼마나 존엄한 것인가.

나도 기쁘다. 줄을 서서 호명 따라 위문품을 받아들고 돌아선다. 하얀 천으로 만든 큼직한 주머니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내가 이곳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알고 왔다면 내 고향 부모 형제의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진 않을까.


직접 위문단을 만났더라면 우리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묻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 많았는데 이 주머니만 남겨놓고 떠나가니 못내 서러웠다. 돌아서서 살며시 주머니를 열어 보는데 사방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 향기로운 양담배 연기가 골짝을 스며들어 자욱하다.

금세 양담배 꽁초가 바닥에 허옇게 깔렸다. 방금 전만 해도 떨어진 저 꽁초 하나면 일개 분대원이 하루를 피웠는데 아까운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로소 내가 받은 위문품을 풀어보았다.

그 속에 양담배 두 포갑 즉 스무 갑의 담배와 세숫비누, 치약 두 개, 칫솔 두 개, 면도기 한 개, 수건 한 장, 세수 후 바르는 크림 두 개, 성냥 등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세면용품이 들어있었다. 근 28개월 만에 만져보는 물건들이다.


흐뭇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새 물건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지급돼서. 위문품은 말 그대로 선물이 아니라 헛헛한 위로용 물건일 뿐이다. 그 어떤 진귀한 물품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지난날들에 대한 서러움을 담배 한 개비 피워 물고 파란 연기를 저 하늘로 날린다.


내뿜는 연기 속에 고향 생각 간절하고 정겨운 동기간의 모습 눈에 떠오른다. 위문품을 받고 기뻐했을 먼저 간 전우들 모습에 눈시울을 적신다. 이 시점부터 수용소 생활에 활기가 넘치고 머지않아 이 생활도 마침표를 찍을 것 같다. 놈들의 간섭도 눈에 띄게 느슨해지고 매일같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어 오히려 지루한 감이 든다.

어느덧 6월이 가고 7월 중순 경에 이르니 비행기 소리 들을 수 없다. 아군기의 출현이 없다. 이 조용한 정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휴전이 된 것인지 다각도로 분석하고 놈들의 행동에서 감을 잡는다.

그러던 중 7월 말이 되자 놈들은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지나갈 때 인사를 하는가 하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정미 넘치는 태도다.


그렇다.

휴전이 된 것이라고 우리들 모두의 입에서 확신이 선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놈들은 어찌나 보안을 지키는지 도무지 일언반구 말이 없다. 어딜 가도 간다는 말이 없고 가봐야 알게 되고 무엇을 한다 하나 결과를 봐야 알게 되고 철두철미 보안 유지다. 작은 틈으로 물이 새 나오듯 외부로 표출되는 행동에는 그들도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다.


드디어 수일 내로 이곳을 떠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쾌활해진 우리들은 활기가 넘친다. 저마다 말라 광대뼈만 앙상한 얼굴에는 오랜 숙원의 기대감으로 붉은 핏기가 감돈다. 절망 속에서 간절히 고개 내민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마침내 붉은 꽃 한 송이 피워낸 보람 아니었을까.


8월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내일 이동한다는 말과 함께 여러 가지 주의사항과 멀지 않은 곳에서 열차 편으로 개성까지 간다고 한다.

“와- 와- ”환호소리 천지가 흔들리는 듯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그날 밤 우리들은 모두 집 마당에 들어선 듯 자기 고향 자랑, 가족 생각으로 밤을 고스란히 지새웠다. 이제 곧 고향으로 돌아가면 무르익은 오곡백과 풍성한 가을이 가죽만 남은 우리들을 반기면서 그 금빛 꿀맛으로 피와 살을 북돋워주겠지. 적지에서 살아남은 불사의 정신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인생의 풍요로운 대지를 개척하리라 마음먹었다.


아침 일찍 식사 후 집합한다.

놈들은 이제야 정식으로 휴전이 되어 동무들은 판문점에서 쌍방의 교환으로 집으로 간다는 말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인해 6.25 전쟁이 정지되었고, 남북은 국지적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며,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었다.

‘포로교환협정’은 1953년 6월 8일 유엔군 측 수석대표와 공산군 측 북한 대표가 6.25 전쟁 중 본국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의 처리를 위한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임무와 운용에 관해 합의한 협정이다. 포로 문제는 휴전협상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1951년 12월 11일부터 논의하기 시작하여 1953년 6월 8일 합의를 볼 때까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의제였다.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 처리에 관한 포로교환협정으로 사실상 휴전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 당시 북한군 포로들은 연합군에게 생포되어 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중립국 감시 아래 미국이 관리하였다. 그런데 북한군 포로의 상당수는 남한 사람들로 북한에 의해 강제로 의용군에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북한군에 끌려갔다가 연합군에 포로가 되었지만 북한을 지지한 것도 공산당을 찬성한 것도 아니었고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이런 관계로 공산당의 조직과 반공포로의 조직이 서로 암투를 벌이는 또 하나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사정을 잘 아는 한국 정부는 전원 복귀를 요구하는 북한의 조건을 수용했다가는 이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것으로 간주하여 반공포로의 석방을 원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포로 전원을 북한으로 보내주지 않으면 미군 포로도 모두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미군 포로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한 미국은 한국 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북한군 포로 전원을 북한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협의문을 작성하기로 했다.


이에 송환 거부 포로의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이송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18일 거제도 수용소의 실질적 경비를 맡고 있던 한국군에게 명령을 내려 일시에 포로들을 석방시키도록 하였다. 한국군은 미리 만들어두었던 반공포로 내 조직을 통해 경계를 푸는 시점에 일시에 도주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국군 경비대가 경계를 풀자 반공포로들은 일시에 도주하였다. 이들은 포로교환 시일이 다가오자 북한으로 끌려갈까 봐 극도의 불안을 느끼던 중 도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은 이것을 탈주로 간주하였고 미군의 발포로 인해 많은 반공포로들이 이 과정에서 애석하게도 죽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공산 측의 보복으로 금성전투 등이 있은 후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선발대 출발.”

소지품이라곤 위문품 하얀 주머니만 어색하게 우리들 각자의 손에 한 개씩 들려있다.

나는 눈물이 핑- 돈다. 간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감격의 눈물이다.

내 나이 24세, 독약처럼 삼킨 청춘의 모진 고생을 이제야 졸업하는구나. 그리고 이 골짝을 빠져나가려면 3.3 폭격 현장을 지나가야 한다. 불과 5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한 많은 짧은 인생을 처참하게 죽어간 동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줄줄 흐른다. 열차 빈칸에 동료들의 넋이나마 태워가고 싶다. 나뿐이랴.


우리 모두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심정, 어두운 그림자가 여실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으로 가는 이 행렬에 동료 한 사람이 빠졌다. 평소에 앞장서서 대중을 선동하고 그들의 요구에 반대한 동료 한 사람이 남게 된 것이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다.

애석하다. 구할 길은 없다.

저 친구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원통하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너무 그들의 눈 밖에 나는 행동 삼가야 했을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한들 이제 무슨 소용인가.

내 차례가 되자 나는 그간의 서러운 정 남기고 자강도(慈江道)의 시중(時中) 땅 휘- 살펴본다. 늘상 우리들의 슬픔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산봉우리들과도 작별 인사를 나눈다. 슬픔은 골짜기에 묻고 늠름한 기상을 다독여주던 산봉우리들이었다.

‘잘 있거라, 시중아. 나는 간다.

내 평생 네 볼모로 붙잡혀 있을까 봐 노심초사하였다. 다시는 못 볼 산맥들이여, 안녕!’

힘찬 발걸음으로 앞사람의 뒤를 따라간다.

시중(時中), 나는 이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가장 뜨거운 내 청춘의 시간 가운데 들어앉아서 내 목숨을 담금질하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성의 양면이 칼날처럼 베인 곳, 내 인생은 시중을 기점으로 전과 후만 있을 뿐이다.

얼마 안 가 큰 강이 나타나고 다리 이쪽에 화물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짐칸에 탔다.

‘객차면 어떻고 짐차면 어떠랴. 가는 길은 마찬가지 어서 가기나 하자. 먼지투성이 지저분한 자리, 옷이 더러워지면 어떠랴. 개성까지는 밤낮으로 며칠을 달려야 하니 편히 쉬어가자.’

드디어 쉬- 푹푹 칙칙 기차가 움직인다.

시커먼 연기 꼬리 길게 남기며 비상하는 새들처럼 남행한다.


아, 지긋지긋한 포로 생활의 지난날들이 한 편의 무언극처럼 아스라이 떠오른다. 이북 땅 이곳저곳 끌려다니면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모진 일터에서 일할 때 따뜻이 대해주던 그곳 주민들의 정다운 얼굴 하나하나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나는 길목마다 보이는 산천초목까지도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어 애꿎은 시달림을 당하였다. 어렵사리 찾아온 평화를 움켜잡고 아름다운 고운 꽃 피워내리라 다짐하는지 피눈물 나는 고생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에게 흔들흔들 환송의 손길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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