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엔 침묵이 필요하지만, 어느 때엔 적당한 말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때에 침묵하고 어느 때에 말을 할 것인지. 때로는 적당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섣부른 말이었음을 안다. 섣부른 것보단 침묵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또 적당한 시기의 적당한 말이 강한 힘을 갖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최근의 어떤 감정, 나는 지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몸이 평소보다 무겁고, 취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이런 날에는 상처받기 쉽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그저 피곤한가 생각하며, 평소와 같이 등선생님과 전화를 하는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느냐는 말에, 내가 우울한가 싶었고. 그렇다면 내가 우울한가. 우울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 퇴근길에 오래전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이게 지금 내 마음에 적당한 음악인가. 내 심정이 지금 이런가 싶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내 상태를 잘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글이든 음악이든 풍경이든 하는 것을 찾는다. 수없이 많은 말과 글과 풍경과 음악이 있더라도, 더 적당한 나를 위한 무엇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또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뇨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제 마음은 지금 이렇습니다. 우울한 게 아니라 무기력한거에요. 불안이 아니라 안절부절 못한거에요. 그러니까 나를 떠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그냥 감정 없이 그런 마음이 들어요. 더 적당하게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진이던 글이던, 내가 왜 찍고 싶어 하는지, 왜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왜 찍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계속 찍고 계속 적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한다. 유아기적인. 마술적인 기대라고 해도 그만두기 어렵다. 매일 이야기를 하고 또 듣고, 글을 종종 쓰고, 오래된 아파트의 화단을 찍는다.
며칠 전에 꿈을 꾸었다. 꿈에선 내가 수지접합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손상된 조직을 현미경을 바라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실과 바늘로 한 땀씩 서로 떨어진 조직을 연결하는 작업. 인턴 때 바라본 수지접합은, 내게는 너무 느리고 답답한 일처럼 생각되어서, 그런 일을 하기 위한 특정 성격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까지 했는데. 내게는 너무 학을 뗄 만큼 지루하게 생각이 되었다.
꿈에서의 나는, 수지접합을 하고 싶은데 다시 전공의 수련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어릴 때야 나 혼자만 책임지면 되니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는데,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닌데. 집에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한 아내와 어린아이들이 있는데 전공의 수련을 다시 받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고 꿈에서 걱정했다.
꿈에서의 수지 접합은 아마도 정신분석가 과정이었을 것이다. 현미경을 끼고 혈관을 한 땀 한 땀 연결하듯, 한 사람의 마음을 주 4회 45분 씨 수년간 듣는 일. 나는 어쩌다 이 일을 하고 싶게 된 것일까. 분석가 과정 면접에서, 세분의 분석가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으나 잘 대답하지 못했다.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기보다, 전 도저히 제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내게는 진실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