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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강 Dec 22. 2020

힐빌리의 노래

소외된 그들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




2016년 11월 9일 한국시간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당일 저녁, 저는 서울역에서 모 뉴스채널 기자로부터 인터뷰를 요청받았습니다. 정장을 입고 있었던 탓에 인터뷰 대상을 매의 눈으로 찾고 있던 기자분의 레이더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주제는 트럼프 당선을 예상했는지 여부였는데, 뉴스에서 전문가들이 미국 언론의 지나친 힐러리 밀어주기로 인한 사회적 피로감과 소위 ‘샤이 보수’의 집결 효과가 트럼프 당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얘기했던 게 기억이 나서, 괜히 트럼프 당선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고 답변했다가 기자의 질문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저것 질문을 받아 그때마다 횡설수설했던 것 같은데, 당일 저녁 뉴스에서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이슈가 될 것 같다는 내용으로 10초도 되지 않는 분량으로 짧게 편집되어 방송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트럼프 덕분에 방송도 타본다고 내심 좋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납니다.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미국 대선이 치러졌고, 이번에는 바이든이 트럼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트럼프의 돌발행동과 자극적인 발언을 해외토픽을 통해 접하게 될 때마다 이처럼 독특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수 있는 미국인들의 마인드, 보다 정확히는 2016년 트럼프를 당선시킬 수밖에 없었던 미국 내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계층은 ‘화이트 트래쉬’라고 불리는 저소득층 백인 노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화이트 트래쉬 계층이 표심을 발휘한 점이 꼽히기도 할 정도입니다. J.D 밴스가 쓴 자전적 소설인 ‘힐빌리의 노래’는 ‘화이트 트래쉬’로 대표되는 백인 노동자 계층이 왜 트럼프를 열렬하게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본인의 인생사를 통해 담담하게 서사적으로 풀어내고 있고, 이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미국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미국 내의 많은 독자들이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기에 넷플릭스가 영화화한 ‘힐빌리의 노래’는 공개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은 작품입니다. 원작 소설의 인기도 한몫했지만, 뷰티풀 마인드의 감독으로 유명한 론 하워드가 감독에다가, 글렌 클로즈, 에이미 아담스, 헤일리 베넷과 같이 연기력이 검증된 여배우들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기 때문이었죠. 공개 일자를 손꼽아 기다리던 필자도 넷플릭스에 공개된 바로 당일에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영화를 감상한 분들이라면 모두 공감하시겠지만, 작품 내에서의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력은 가히 압도적입니다. 슈퍼맨 시리즈에서 청순한 히로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에이미 아담스가 ‘힐빌리의 노래’에서는 약물에 중독되어 구제불능이 된 싱글맘을 연기하는데, 캐릭터 변신을 위해 제대로 망가진 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J.D 밴스 역할을 맡은 가브리엘 바쏘의 연기 역시 일품입니다. 소설의 원작자가 마치 본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듯이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참고로 아역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 역시 훌륭합니다. 영화 스토리 자체가 과거와 현재 시점을 넘나들며 진행되기 때문에, 사실상 주인공 J.D 밴스의 절반의 모습은 아역배우의 명연기의 향연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의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약물중독이 있는 홀어머니 밑에서 누나와 함께 가난한 환경에서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면서 성장한 주인공이 외할머니의 조력 하에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여 결국은 예일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중요한 로펌 면접을 목전에 두고 어머니의 급환으로 고향으로 돌아와서 겪게 되는 하루 남짓한 기간 동안의 에피소드와 유년기의 회상이 작품의 스토리 라인입니다.


      

어찌 보면 국내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도 자주 다루어지는 ‘인생역전’이라는 키워드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작품의 스토리는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하게 전개됩니다. 보는 이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 정도로요. 개인적으로는 ‘힐빌리의 노래’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주제의식이 상당히 맞닿아 있는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미 사회 내부에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 빈부격차 내지는 사회 계층화라는 주제를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성찰하게 만드는 부분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생충’이 관객을 웃기면서도 씁쓸하게 만든다면, ‘힐빌리의 노래’는 관객이 주인공의 인생을 그냥 담담하게 관찰하도록 하면서 원작 소설과 영화의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차이가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내에서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 장면으로는 주인공이 면접 기회를 얻기 위해 유명 로펌 파트너들과 식사를 하게 되는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일 로스쿨은 미국 최고의 인재가 모인 곳이기 때문에, 졸업 이후에는 유명 로펌에 쉽게 취직하여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식사자리에서 다른 동기들처럼 무난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면접 제안을 용이하게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무난하게 행동하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포크와 스푼을 어느 순서대로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식사 중간에 빠져나와 여자친구에게 사용방법을 물어봐야 하고,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로스쿨 동기들 사이에서 본인은 주립대 출신에 해외파병을 다녀왔다고 밝혀야 하고, 본인의 출신과 고향을 폄하하는 로펌 파트너에게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쏘아붙이게 되기도 하고, 면접 기회를 받느냐 못 받느냐의 중요한 기로에 놓은 상태에서 누나로부터 어머니 일로 고향으로 급하게 내려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전화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동기들에게는 좋은 기회를 매우 편하게 가질 수 있는 식사자리이지만, 주인공에게 그 식사자리는 결코 편하지가 않습니다.

      

예일대 로스쿨이라는 최고의 학벌은 졸업생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영화 속의 이 장면이 작품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글 중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었습니다. 대충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입학했는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본인은 방세, 책값,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동기들은 편하게 용돈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고, 해외에 어학연수도 다녀오면서 학점과 스펙의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게 되고, 결국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편하게 공부해서 좋은 스펙을 보유하게 된 대학 동기의 소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2030 세대라면 쉽게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새 스펙이 당연히 돈으로 살 수 있고, 또 마땅히 돈으로 사야 하는 개념이 되어버린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학창 시절을 보낼 때만 해도 열심히 공부를 하면 인생역전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버렸습니다. 명목상 기회는 공평하나, 기회를 실질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결코 공평하다고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힐리의 노래’는 그 배경이 미국 사회이지만, 사회적 계층화라는 주제로 접근해서 보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원작 소설 작가인 J.D 밴스는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현재는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 속 장면에서도 나오지만 주인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가 멘토 역할을 수행하여 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외할머니가 약물중독에 빠진 딸이 정상적인 자녀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자 어린 주인공을 본인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우고, 주인공이 질이 나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자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 교우관계를 끊도록 하고, 주인공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준 덕분에 주인공은 학업에 정진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외할머니의 조력이 없었다면 주인공 역시 누나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근근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죠.      




‘힐빌리의 노래’가 트럼프 지지자들의 배경을 다루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은 바로 주인공인 J.D 밴스와 같은 드라마틱한 계기나 기회, 이를테면, 약물중독 어머니로부터의 격리, 외할머니의 적극적인 지원, 해외파병, 예일대 로스쿨이라는 엄청난 학벌과 같은 특별한 요소가 없다면, 미국 사회의 하층민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회 계층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종차별, 가난 등으로 인해 흑인사회가 미국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것과 마찬가지로, ‘화이트 트래쉬’로 대표되는 백인 노동자 계층 역시 사회적 기회 배분의 사각지대로 서서히 내몰리게 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러한 상태가 하나의 정치·문화·경제적 응집체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응집체는 2016년도 트럼프의 대선 승리에 큰 기여를 했으며, 현재까지도 트럼프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기술했지만 ‘힐빌리의 노래’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 역시 경제 수준에 따라 사회적 계급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공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에 있고, 교육, 노력, 재능에 따라 상위계급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세대의 박탈감은 극심한 상태에 있습니다.

     

 ‘20대의 우경화’라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매스컴에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들의 분노는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불황으로 인해 일자리의 절대적인 숫자가 부족해지고,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원하는 직업을 가지기가 어렵고, 경제적 수준에 따라 기회의 불평등이 만연하게 발생하고, SNS 등으로 인해 만성적인 상대적 빈곤에 빠지게 되면서, 청년층의 삶의 만족도는 매우 낮은 상태에 있고, 이는 자연스럽게 경제성장의 과실을 편하게 독점한 것으로 보이는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반발심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젊은 계층으로 이루어진 극단적인 보수성향의 집단이 계속적으로 응집하는 모습은 마치 트럼프를 당선시킨 백인 노동자 계층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있는 듯합니다.

      

주인공인 J.D 밴스가 계층적 굴레에서 벗어나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외할머니와 같은 멘토의 존재와 군 입대를 통한 학비지원 등 사회적 제도가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무수히 많은 청년정책 중 정말로 실효성이 있는 정책은 무엇인지, 실질적으로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멘토링 제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의지와 체계적인 목표가 있는 청년들이 걱정하지 않고 학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가 어떠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된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미국은 이제 바이든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트럼프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많이 남아있는 만큼 국민들의 통합이 새로운 정부의 해결과제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습니다. 결국 ‘힐빌리의 노래’가 다루고 있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은 그대로 존속 중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리고 영화가 주는 메시지, 사회현상에 대한 고찰은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보다 많은 J.D 밴스가 나올 수 있는 사회, 청년들이 조금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해봅니다. ‘힐빌리의 노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이 정도 희망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지 않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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