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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 Feb 02. 2024

정리해고의 재발견

"A coin has two sides."

정리해고에는 언제 다시 취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계속되는 거절과 탈락으로 인한 자존감 하락 등의 역기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정리해고에도 동전의 양면이 존재합니다. 저는 요즘 정리해고의 순기능으로 인해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요.


첫째, 최근 제가 꽤 괜찮은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늘 맘은 있지만 실천은 못해 저 스스로를 의지박약으로 저평가해 왔어요. 정리해고 된 후 둘째 날부터 저는 9시가 되면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고 적어도 11시면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문제 푸는데만 급급하지 않고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더 나은 해결방식은 없는지 고민합니다. 제가 쓰는 프로그래밍 언어와 라이브러리가 이전처럼 대단히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저도 노력하면 정말 뛰어난 엔지니어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깁니다.


둘째, 저는 요리를 싫어하지 않아요. 학교 끝나 집에 온 아이들이 제게 하는 첫마디는 대개 "엄마, 저녁 메뉴는 뭐예요? 맨날 한식만 먹어서 지겨워요."였습니다. 늘 나가서 밥을 사 먹는 건 아니었지만, 한참 클 나이의 입 짧은 아들들을 잘 먹여야 한다는 이유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넉넉히 사서 먹이곤 했어요. 돈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저의 음식에 대한 상상력과 응용력은 한층 풍부해졌다. 만들어진 피자 도우를 사다 신선한 재료를 얹어 직접 피자를 오븐에 굽고 (아이들 어렸을 때 해보고 거의 10년 만에 다시 함), 멕시코산 양념이 들어있는 쌀을 사서 고기와 야채, 소스를 넣어 멕시코 음식인 브리또를 만듭니다. 예전 같으면 먹고 남은 양념구이 치킨은 버렸을 텐데, 요즘엔 곰탕에 넣어 새로운 요리로 탈바꿈시킵니다. 아이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 경험 상 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이 불평을 안 한다는 얘기는 "꽤 괜찮다"라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셋째, 평소에 아무 감흥 없이 당연스레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이전에는 회사로 배달되는 다양한 음식들이 짜고, 기름지고, 차갑다는 이유로 구시렁대었던 적도 많았어요. 내 돈 주고 산 점심도 아니고 회사가 매일 $18 (팁 없이)까지 식비를 지원해 줘서 원하는 음식을 시킬 수 있었어요. 점심을 먹은 후에는 동료들과 회사 주변을 가볍게 산책했습니다. 출근할 곳이 없는 요즘은 매일 수수한 한식으로 점심을 후딱 차려 먹고, 도서관까지 혼자 걷는 것으로 산책을 대신합니다.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친했던 예전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산책하다 생각나서 톡 보낸다고, 이전에 같이 밥 먹고 산책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었다고...   


마지막으로, 실직한 덕분에 멋진 취미생활을 찾았습니다. 이전에 캐나다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했던 조연 배우에게 노래를 2달 정도 배웠으나 재능이 전혀 없음이 판단돼 그만뒀습니다. 남편과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 배웠던 테니스는 3달 만에 레슨을 멈췄구요. 테니스를 배우다 골프 엘보우로 팔꿈치 통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테니스 치다 테니스 엘보우도 아니고 골프 엘보우라니...' 전 정말 운동과 상극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제 취미 생활에 돈 쓸 여력이 없어지자 돈 하나 들지 않는 취미 생활, "글쓰기와 책 읽기"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책과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아주 많았고, 언젠가는 꼭 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을 마음 한편에 뒀습니다. 재취업까지의 과정과 제 일상을 기록해 볼 요량으로 시작한 블로깅으로 저는 브런치 작가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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