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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두연 Jun 04. 2021

[감상-영화]  노매드 랜드

house or home


어느 날부터인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애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마 월세살이를 벗어나 전세로 이사를 한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월세살이는 특유의 짐스러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다달이 돈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 그 돈을 내지 않고 모았더라면 하는, 모두가 하는 상상에서 비롯된 세어나가는 돈에 대해 드는 아쉬움 같은 것들. 전세로 들어온 집은 나의 그런 마음들을 한 번에 사라지게 해 줬다. 전세 계약 2년 동안 허용된 일시적 안정감이라고 볼 수 있다.


잠시 허용된 안락함이지만, 나의 집 냉장고에는 맛있는 잼을 잔뜩 넣어두었고 찻장에는 원두도 넉넉하다. 좋아하는 친구랑 좋아하는 음식을 해 먹으며 산다. 쓰레기도 제 때 버리고 청소기도 하루에 한 번씩 민다. 미니 책꽂이에는 사랑하는 문학 책들이 여러 권 꽃아 져 있으며 조그마한 장난감으로 꾸며도 놓았다. 옷도 깔끔히 걸어 두었고 각자의 속옷이니 양말이니 하는 것들도 잘 정리해놓았다. 현관문에는 엽서와 사진들을 붙여놓아 언제든 그 기억을 가지고 밖에 나갔다 올 수도 있다. 아빠가 사주신 아일랜드 식탁에서는 밥을 먹는 것은 물론이요, 차도 마시고 학습지 숙제를 하기도 한다. 냉장고 소리가 크게 들리지만 적당히 무시할 수 있다. 최근에는 자투리 공간에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아 나의 심신 안정을 다스리며 일기를 쓰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세상 속에 섞여 일을 하고 사람들과 살아간다는 사실은 때때로 큰 두려움이 되어 다가온다. 친구들과 진탕 놀고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오늘 내뱉은 말들에 대해 생각한다. 게다가 각종 세균과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많은 이 곳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깨끗한 나의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강렬히 느낀다. 집은 안전하니까. 마음을 놓아도 되는 곳. 더불어 사랑하는 것들을 전시해둔 곳. 나의 생이 이곳저곳 묻어있으며 생을 생답게 만들어주는 공간. 몸을 뉘윌수 있는 나의 집.


참으로 만족스러운데 겨우 이까짓 기본적인 행복에 만족하게 만드는 세상의 사정도, 그렇다고 그 사정에 휩쓸려 다음 이사에는 대출을 더 받아 좋은 집으로 가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도,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이해하기엔 불편한 것이 현실이다. 주택난에 놓인 이 시대의 젊은이는 어떤 주거공간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나. 이 시대의 주거의 의미란 단순한 실주거만이 목적이 아닌 재산증식의 기회이기에 나는 집을 안락의 공간만이 아닌 미래 도약의 가치로까지 봐야 하나.





얼마 전 본 영화 <노매드 랜드>의 주인공 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녀는 작은 벤 안에서 생활한다. 벤 안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선물로 준 빈티지 그릇들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이 있다. 남편을 잃은 후 세월이 흘러 직장까지 잃은 그녀이지만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집은 잃지 않은 셈이다.


그녀의 집은 벤이기에 이동이 가능하다. 이동이 가능한 대신 전기와 물, 화장실을 누리진 못한다. 배수 시설이 없기에 자주 목욕을 할 수 없으니 그녀의 머리는 나날이 짧아졌을 것이고 주소지가 없으니 거리에 벤을 주차하기라도 하면 단속하는 경찰들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정착하지 못하니 이곳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뜨내기 생활을 하고 뜨내기 생활을 하다 보니 생활고를 달고 살며 그녀에게 있어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은 더욱 잦다.


그러나 노매드들의 선구자  밥은 이 생활에는 영원한 이별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은 떠나는 이에게 '잘 가'라는 인사가 아닌 '언젠가 다시 만나자'라고 인사한다고 한다. 밥은 죽어버린 자신의 아들 또한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철학적인 대답이었다. 불교의 윤회 사상이 떠오르기도 하는 대답은 길 위에서의 삶뿐만이 아닌 영화밖에 있는 나의 삶까지 되돌아보게 했다. 삶이든 죽음이든, 우주의 신비이든 신의 계획이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까?


밥의 말의 일리가 있는 것이 주인공 펀은 길 위의 삶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 스치고 작별하지만, 매번 다시 돌아오는 한 해처럼 생은 돌고 돌았다. 작별의 연속이 아닌 삶의 연속. 해피 뉴 이어의 반복. 그러기에 노매드를 하는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상실을 길 위에서 치유받는다. 죽어가는 육신의 고통도 가족과의 틀어진 관계도 가난도. 전부. 펀은 남편을 떠날 수 없어 houes를 옮기지 못하고 장소의 이동만을 하는 home에서 사는 것으로 마음의 상실을 대신한다. 지붕이 있는 집에서 두 발을 뻗으며 잠을 청하는 것보다 이곳저곳을 떠도는 작은 벤이 더 안락한 이유는 펀이 가진 마음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허용된 안락함이 나의 두려움을 증폭시키진 않았나 생각해본다. 나는 이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해 대출을 받았고 월세 부담감은 사라졌지만 전기료, 수도료, 가스료, 티브이 수신료 등등 현대 사회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생활비는 여전히 내고 있다. 또한 자가가 아닌 전세이기에 결국 온전한 나의 소유의 집은 없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놓고 마음을 놓는 공간이지만 결국은 남의 집. 벽지 하나를 바꾸는 일도 허락을 받아야 하고 내 돈을 들여 도배를 해도 2년 뒤면 나가야 하는. 다시 새롭게 살 집을 찾아 집을 보러 다니고 집주인과 계약을 하고, 짐을 싸고 풀고의 반복. 힘들게 영위하는 삶이니 만큼 애착은 커져간다.


펀은 벤에서 생활하기 전에 살았었던 자신의 예전 집을 찾아간다. 이 집은 바퀴가 없다. 경제가 죽어버려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 일거리가 없으니 더 이상 그곳에서 살아갈 수 없어 펀을 길 위에 유랑하게 만든 집.

펀은 한참을 그 속에 몸 담고 생각한다. 이제 가야지. 몸이 아닌 마음이 떠난다. 추억들과 작별을 한다. 앞서 말했듯이 작별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인사. 수없이 떠나고 돌아섰을 길 위를 그녀의 벤이 달린다. 다시 바라보는 풍경이 새롭다. 새로운 풍경을 스치고 스쳐 그녀는 비로소 만난 새로운 길 속을 달린다. 


나도 작별을 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들은 결국 작별했고 작별할만했으니 작별했다. 그리고 이제 내 마음의 안식을 생각해본다. 내가 안식을 얻은 것들. 에어컨이 없어 땀을 삐질 흘리는 집을 나와 옥상에 텐트를 쳐놓고 달과 별을 봤던 순간. 집들이를 한다며 작은 테라스에서 고기를 굽다가 프라이팬 손잡이가 꺾여 고기를 바닥에 전부 쏟았던 순간. 옆 건물 아저씨가 일군 작은 텃밭에서 따준 상추를 내가 있는 집으로 던져줬던 일. 새로 이사 온 집 천장 형광등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야광별 스티커를 보며 까르륵 웃었던 날. 나의 home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주택난의 시대의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다. 지금 당장 house를 얻는 것은 글렀으니 home라도 얻자! 그러다 언젠가 나만의 house를 만났을 때 겪었던 각각의 home들을 잊지않을 것이다. 그래야 주인공 펀처럼 새로운 길 속으로 달리게 되더라도 스치는 풍경들이 아름답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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