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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운트플라워 Nov 15. 2024

다리 잘린 비둘기를 본 적 있나요

다리가 잘려도 정신없이 모이를 쫀다

아침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류장 옆 비둘기 무리가 보였다.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 유해조류로 지정된 녀석들이다. 적응력이 너무 뛰어나 어떤 때는 사람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다 버스도 같이 타게되는 거 아닐까하는 우습고도 섬뜩한(?) 생각도 하게 만드는 존재다. 워낙 흔하게 보이는 녀석들이라 평소 자세히 관찰하지는 않는데 오늘은 유독 눈에 띄는 녀석이 있었다. 다리 한쪽이 잘린 비둘기였다. 남아있는 다른 쪽 다리 마저도 발가락이 2개 뿐이었다.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을텐데 그녀석은 조금 뒤뚱거리긴 했지만 먹이를 찾아 부리로 바닥을 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실 이런 비둘기를 처음 본 건 아니다. 돌아보면 다리가 잘리거나 발가락이 없거나 하는 비둘기를 생각보다 꽤 자주 봤다. 그럴 때마다 드는 감정은 그냥 불쌍함과 연민이었다. 쟤들도 다리가 잘려나갈 땐 아팠을까. 자연 치료가 된 걸까. 지금은 아프지 않은 걸까. 근데 오늘 만난 다리 잘린 비둘기를 보며 들었던 감정은 그때와 달랐다. 연민이 아닌 반성이었다. 그 녀석은 남은 발가락과 다리를 가지고 뒤뚱뒤뚱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녔다. 다리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물론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나보다 더 낫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내 상황 때문이었으리라.


나이 서른이 넘어 가정이 생긴 내가 새 직장을 구하는 처지가 되어 보니 20대에 구직을 할 때와는 감정적으로 너무 달랐다. 20대에는 걱정이 없었다. 목표는 막연히 높았고 노력은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크게 걱정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젊음이 주는 막연한 자신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서른이 넘어보니 달랐다. 점점 먹는 나이는 어깨를 짓눌렀고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슴을 후볐다. 그래도 무너질 수는 없었기에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심리학 관련 책을 읽고 유튜브로 전문가 강연을 찾아 들었다.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근데 그 답을 말해줄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녔다. 불안한 상황에서는 누군가를 통해 듣는 것이 스스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와닿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해답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였다. 그런데 어떤 책이나 강연보다도 훨씬 큰 확신을 주는 존재를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만났다. 바로 그 비둘기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리가 잘리고 발가락이 두 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녀석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살기 위해서 뒤뚱거리며 끊임없이 먹이를 찾아다녔다. 아마 그 녀석은 살아 있는 한 내일도, 모레에도 계속 먹이를 찾으러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닐 것이다. 한낱 비둘기도 하루 하루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왜 나는 지금 당장할 수 있는 일도 실행하기 어려워하는 것인가. 동물 중에 가장 월등한 존재라고 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런 간단한 행동조차 실행하지 못하는 것일까. 상대적으로 높은 지능이라는 것이 때로는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는 걸 느낀다. 비둘기 녀석을 보며 또 우울감과 무력감에 젖어드는 나라는 인간은 정녕 그 녀석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 고민의 끝엔 변화가 있다. 그 녀석이 본능적으로 실천하는 생의 진리를 보며 깨달음을 얻고 나 자신의 상황에 맞춰 응용할 수 있다. 비둘기가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보며 어떤 상황에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진리를 배우진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이 깨달음과 응용력이 인간이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불안함과 무력감이 나를 덮친다. 그럴 때마다 그 녀석을 떠올려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이 무의미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전에 움직인다. 고민할 시간에 움직이고 혹여 그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응용하고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 가만히 고민하고 앉아 있는 시간보다 낫지 않을까. 하지만 무작정 고민하는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 또한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비둘기 녀석이 오래오래 바닥을 쪼아대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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