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저주받은 이유가 하나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반항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인간이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 문단에 나열할 단어들은 나에게 모두 같은 의미로 느껴지기에 이르렀다.
삶=신=하느님=의지=운명=작용=무목적=변덕=비이성=해명할 수 없는=감각=세계=현실=부조리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으며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무언가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정의 내리기 어려운, '느낌'이나 '감각'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감각의 단어들 중에서도 남을 설득하는데 불가능에 가까운 단어들이다. 따라서 이 단어들이 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지녀야 한다.
나는 위의 단어들 중 무엇보다도 '삶'이라는 단어가 좋다. 그래도 '삶'이라는 단어에는 우리 존재가 개입할만한 요소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삶'이라는 용어에 신, 하느님, 의지, 운명의 '감각'을 모두 포함시킬 것이다.
삶은 한 실존이 살아가는 현실의 배후에서 개체에 대해 '작용' 하기 마련이다. 이때 실존에게 작용하는 삶의 작용은 개별 존재를 괴롭히거나, 개인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주적이고 맹목적인 생명력의 표출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에 작용하듯 삶도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일 뿐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인간은 자신에게 닥치는 '삶의 작용'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본디 인간이란 욕망과 희망을 가지고 살기 마련인데, 삶의 작용이란 인간이 가지는 욕망과 희망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맹목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삶이 하나의 개체보다 전체의 균형을 위해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계속 말해왔듯 삶의 작용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다.
이 경우에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그저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계기로 -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 그 감각이 살아나게 되면 삶의 무목적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은 양자택일에 놓이게 된다.
To be or not to be.
살아갈 것인가 자살할 것인가? 우리의 모든 자유의지는 삶을 받아들일지 말지의 시점에서만 온전히 발휘될 수 있다. 당신이 살아가기로 선택했다면 삶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난다. 피해의식과 원망으로 가득 차서 자신의 삶을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살아만'갈 것인가? 인간의 욕망과 희망을 무시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표상을 세울 것인가?
표지의 그림을 다시 보고 생각해 보자.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지는 것을 볼 때, 어떤 모습으로 대응할까?
파도를 원망하며 무릎 꿇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모래성을 덮치는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 모래성과 함께 무너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