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휴가는 일본의 다카마쓰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보냈다. 이번 휴가는 숙소 근처에서 맛있는 맥주와 음식을 먹으며 편히 쉬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부터 여자친구가 데시마 섬에 있는 미술관 입장권을 예약해 두었다. 그 덕분에 다카마쓰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데시마 섬이라는 곳을 가는 일정이 있었다. 다카마쓰 주변에는 작은 섬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데시마 섬이다. 데시마 섬은 작은 미술관과 다랭이 논이 있는 섬이다.
데시마 섬에 가는 날 아침, 숙소를 나와 다카마쓰 항으로 페리를 타러 걸어갔다. 한 30분 정도 거리였다. 많은 학생과 직장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교 및 출근을 하고 있는 아침이다. 이렇게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니는 풍경은 네덜란드 이후 처음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상쾌함이 깃들어 있어 보인다. 바람의 시원함 때문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쾌한 표정들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덧 다카마쓰 항에 도착했다. 페리를 타고 데시마 섬으로 향했다.
데시마 섬의 이에우라 항에 도착해서는 선착장을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섬에 1대뿐인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마을버스 크기의 이 버스의 정원에 들지 못하면, 마을에 1대뿐인 택시를 타거나 전기자전거를 타야 한다. 금액은 버스에 비해 10배 정도 비싸다. 데시마 미술관은 예약제로만 운행되기 때문에 다음 버스를 기다릴 여유는 없다. 버스 앞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기사님이 사람들을 카운팅 하기 시작하신다. 줄이 길어서 조마조마했지만 간신히 나와 여자친구가 마지막 카운팅에 들었다. 마지막에 타다 보니 출입문에 밀착해서 타게 되었다. 출입문이 고장 나서 열리는 일이 없기를 바랬다. 다행히 출입문은 버스기사님의 버튼에만 열리도록 잘 정비되어 있어 무사히 데시마 미술관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데시마 미술관 버스정류장은 섬의 제일 꼭대기에 있었다. 정류장에 내리면 발 밑으로 초록을 띈 계단식 논이 섬 밑자락까지 쭈욱 놓여 있었다. 마지막 계단 밑으로는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초록 물감에 미끄러져 파란 물감통으로 확 빠져들고 싶은 풍경이었다. 빠지고 싶다는 마음을 다 잡고 계단식 논의 옆에 있는 데시마 미술관에 다다랐다.
데시마 미술관은 예약제로만 운영하고, 건축예술물(이하 건출물) 1개만 있는 미술관이다. 입장 시간에 맞춰서 입장을 시작했다. 건축물은 숲 속에 숲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어져 있기 때문에 숲의 입구부터 건축물까지 걸어가야 했다. 입구부터 바닥에 깔린 작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숲이 나온다. 숲의 나무들의 잎사귀 사이를 통과한 햇살은 오솔길 위에 다양한 모양의 예술품들을 만들어냈다. 그걸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오솔길 왼쪽으로는 바다 냄새와 파도 소리가 바람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바다는 지칠 줄 모르고 '이게 바로 예술품이지' 하면서 자신을 뽐낸다. 오솔길에서 만난 자연의 예술에 심취하다 보니 어느덧 건축예술품에 도착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출예술품은 큰 돔처럼 생겼다. 돔의 크기는 가로 40m, 세로 60m라고 한다. 입구는 하나이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건축물 안에서는 말을 포함한 모든 소음을 내면 안 된다. 숲과 일체가 되어 있는 이 건축예술품은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족들이 사는 집처럼 숲과 하나가 되어 있다. 다만, 호빗족의 집처럼 흙과 나무로 지어지지는 않았고, 회색의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다. 흔히 말하는 노출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건축물이다. 건축물 안은 너무나 고요하다. 건축물 양 끝 천장에는 큰 구멍이 각각 뚫려있다. 두 개의 구멍을 통해 바람, 햇빛, 자연의 소리가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바닥에는 산발적으로 바늘 구멍처럼 미세하고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데 그 구멍으로 작은 물방울들이 솟아 나와 바닥의 장력에 의해 또르르 흘러가고 있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또르르'하고 흘러가는 물방울이 이렇게 귀엽고 아름답다는 걸 처음 느꼈다. 숲 속의 정령이 산다면 이런 곳에 살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햇빛, 하늘, 바람, 자연의 소리, 물방울을 응축시켜 놓은 이 공간은 나에게 명상을 술술 불러오게 하는 공간이었다. 10년 전 인도에 가서 명상을 배웠을 때의 기운이 샘솟아 차분히 앉아서 명상을 시작했다. 잡념이 떠오르지 않고 온전히 나와 자연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체감상 30분 정도 명상을 한 것 같았는데 2시간이나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만큼 몰입이 잘되는 공간이었다. 알의 내부 같이 생긴 이 공간에서 명상을 마치고 나오는데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느낌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아주 작은 섬, 데시마 섬은 살아가면서 마음이 너무 힘들거나 아플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나에게 인공호흡기가 되어 줄 수 있는 장소로 저장해놓고 싶은 섬이다. 이 장소를 알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감명을 준걸 보면 섬이 나를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