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이 사랑한 두 명의 여인
한때 나는 피카소가 여자를 그렇게 많이 갈아치운 것을 혐오했다. 몇몇 예술가들은 '뮤즈'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착취했다는 인상을 풍긴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만큼이나 인간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요소는 없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서 다시, 그리고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랑에 늘 충실했던 화가 샤갈이 존경스럽다.
내가 샤갈을 처음 좋아하게 된 것은 로맨스 영화 <노팅힐(1999)> 덕분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는 윌리엄(휴 그랜트 분)에게 용기를 내어 진솔한 고백을 한다. "나도 그저 한 남자애 앞에서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여자애일 뿐이에요." 그때 안나가 진심을 전하기 위해 선물한 그림이 바로 샤갈의 그림이다. 윌리엄 방의 벽에 붙어있는 복제본을 보며 두 사람은 사랑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 맥락 속에서 샤갈의 그림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고 또 감동적이었다. 그때부터 내게 있어 샤갈은 '사랑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내가 만난 남자마다 샤갈의 그림에 편지를 써줬던 것은 다소 우습지만.
샤갈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의 한 복판에 있었지만 그의 그림은 언제나 독창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활동한 아프레 게르 예술가 중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화폭에 가장 많이 담아낸 화가가 아닐까. 더군다나 샤갈은 노년기에 들어서도 따뜻한 사랑의 빛깔을 화폭에 담았다. 그러나 피카소나 고갱처럼 여자 문제로 오늘날까지 구설수에 오르는 예술가들과 달리 샤갈이 평생에 걸쳐 사랑한 여자는 오직 두 명 뿐이다.
첫 번째 부인 벨라는 대학 때 만난 첫사랑과 같은 여인으로, 샤갈과 벨라는 30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세계 제2차 대전 중 벨라의 죽음에 의해 비로소 끝을 맞이한다. 8년 후 샤갈과 벨라의 딸인 이다의 적극적인 주선에 힘입어 샤갈은 드디어 두 번째 부인 바바를 만나 재혼을 한다.
샤갈의 그림 세계에서 언제나 빛나는 존재로서 널리 알려진 것은 첫 번째 부인 벨라이다. 부유한 보석상의 딸로 아주 총명한 학생이었던 벨라에게 가난한 청년 샤갈은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뮤즈가 인생의 동반자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으니, 샤갈의 결혼생활은 예술가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싶다. 두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랑을 했길래 샤갈이 그렇게 늙은 나이까지도 오로지 한 여인을 향한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화폭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정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갈의 그림은 이런 첫 번째 부인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 아니라, 노년에 만난 두 번째 부인 바바를 모델로 한 <바바의 초상(Portrait de Vava)>이라는 건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다.
벨라를 향한 샤갈의 그림과 바바를 다룬 샤갈의 그림은 내게 꽤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벨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그림은 현실감이 없고 꿈속을 헤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반면 바바를 그린 그림은 훨씬 담담하고 담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벨라와 젊은 시절 나눈 사랑이 뮤즈와의 꿈같은 열정이라면, 바바와 노년에 공유한 애정은 따뜻한 닭고기 수프와 같은 다정함이 아니었을까. 죽음의 순간 샤갈이 마지막으로 머릿속에 떠올린 여인은 둘 중 누구일까? 아참, 딸내미 이다도 딸바보처럼 애지중지했던 샤갈이라고 하니 이다를 가슴에 품고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벨라가 되든 바바가 되든, 나도 누군가에게 끝없는 영혼의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샤갈의 그림은 언제나 내게 그런 희망을 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