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라 Nov 05. 2024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10화. 런던에서 보낸 여름



첫 아이 주희가  7살이 되는 2013년 여름, 우리 가족은 런던으로 떠났다.

주희의 7살 여름은 런던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아이의 돌잔치를 치르며 세운 오래된 계획이었다.

돌반지를 팔아서 통장을 만든 것이 그 시작이었는데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하는 중이다.

금 값이 이렇게 비싸지다니!!!! 그 때 그걸 팔지 않고 가지고 있었으면 돈이 대체 얼마야!!!!



런던 첼시에 작은 방 한 칸을 얻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느리게 흘러가는 여름을 보냈다.

작은 아파트의 방 한 칸에서 김해인 씨와 나, 그리고 주희 우리 세 가족은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고 한 끼도 거르지 않고 함께 먹었다.

지금이 아니면 우리가 언제 한 침대에서 오글바글 거리며 잠이 들겠냐고 좁은 침대에 누워 깔깔 웃었다.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에는 김해인 씨는 이미 촬영부 퍼스트로 제법 잘 자리를 잡아서 포커스를 제일 잘 하는 사람으로 손꼽혀 하루도 쉬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아침 10시에 드라마 한 편을 끝내고 오후 2시에 새로운 촬영을 할 만큼 정신없이 일을 했다.

같이 얼굴보며 밥 한끼 먹기가 힘든 시절이라  우리는 이렇게 딱 붙어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런던에서의 시간은 정말 멋졌다.

골목골목 산책하듯 걷다가 동네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월요일에는 꼭 동네 도서관에 갔다.

슬슬 걸어서 미술관에 갔고 주희는 그림을 그리고 공원을 뛰어다녔다.

곰돌이 푸우의 무대인 숲에서 우리는 푸우 그림책 속 놀이를 따라 하고

아더왕의 전설이 담긴 언덕을 오르고

피터래빗이 태어난 호수마을에서는 소중한 것을 지키는 가치를 마음 깊이 담았다.

에든버러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축제를 즐기고

렌터카로 하이랜드로 가는 길에는 숙소를 못 구해서 어릴 적 책에서 읽었던 괴물 네시가 살고 있다는 네스 호수 앞에서 세 가족이 푸조 경차 안에서 쪼그리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라 생각하며 살았던 아일오브스카이에 도착을 했을 때 드디어 여기에 우리가 함께 왔구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 혼자면 오지 못했을 곳인데 가족이 함께여서 가능했고 , 함께여서 의미 있었다.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큰 힘을 주었다.

여행에서도, 세상살이에서도.


런던은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하던 곳이어서 내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 함께 가고싶은 곳이 넘쳤지만  런던에서  김해인 씨와 가장  먼저 간 곳은 템즈강변의  BFI Southbank였다.

런던에 살던 시절 수 없이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히 떨어졌던 가장 사랑하는 극장, 영국 영화 협회 British Film Institute.

템즈에서도 가장 멋진 구역인 Southbank에 자리잡은 BFI는 도서관, 카페, 서점 그리고 네개의 상영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해인 씨는 언젠가 자신이 찍은 영화가 여기에서 꼭 상영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감탄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꼭 10년 후, 2023년.

바로 그 장소에서 김해인씨가 촬영한 영화가 상영되었다.

5번 상영이었고 주말 상영은 전석 매진이 되었다.

이건 한 개인에겐 너무나 중요한 역사여서 꼭 런던으로 가서 눈으로 봐야 하는 거라고, 김해인씨보다도 내가 설레여서 방방 뛰었다.

마지막 상영을 앞 둔 하루 전날까지 나는  항공권 예약사이트를 들여다보며 가슴 두근두근했지만 둘 다 시간이 나지 않아서 결국 런던은  가지 못했다.

런던 BFI에서 상영이 결정되었을 때 김해인 씨는 내게 말했다.

이건 이십 년 전에 내가 열심히 넣은 이력서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이다.

내가 그때 넣은 이력서가 붙어서 일을 하게 되었으면 한국에 안왔을꺼고 자기랑 결혼도 안 했을걸? 깔깔거렸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에 마음이 간질거리며 한참을 설레었다.

생일에도 꽃 한 송이 선물할 줄 모르는 김해인 씨의 낭만은 그런 거였다.

영화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내 이름을 찍어서 제일 먼저 가져오고 ,  크레딧에 이름을 넣어주는, 정말 영화인다운 낭만.

그리고 나는 다행히 티파니 반지보다 그런 쪽이 훨씬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즐거웠던 런던생활은 우리의 계획보다 빨리 마무리되었다.

김해인 씨가 갑자기 중국 촬영을 가야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동료들이 최대한 날짜는 늦춰주며 시간을 벌었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중국, 한국을 거쳐 영국까지 서류들이 국제 우편으로 오고 갔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지금 생각하니 조금은 불편해도 그 때가 참으로 낭만적인 시대였네, 생각이 든다.


런던생활을 조금 빨리 정리하고 4개월 일정으로 바로 중국으로 떠난 김해인 씨.

중국이 김해인씨 영화 인생에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 때만해도 전혀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보낸 여름




작가의 이전글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