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엽떡 배달이 안된다고요?

by 은혜

나는 봉천동에서 태어났다.
아장아장 걷던 시절의 사진을 보면, 중단발에 커다란 나비안경을 쓴 멋쟁이 아빠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내가 있다. 사진의 배경에는 커다란 전축이 놓여 있다.

‘그 전축이 있던 집이 내 집이었을까?’
엄마에게 물었더니 내가 아가일 적 우리 집은 지금의 서울대입구 사거리 근처 어딘가에서 전축가게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 가게를 몽땅 털어가면서 우리 집은 망했다고 한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봉천동 어딘가에서 사글세를 살았다. 사글세란 지금의 월세와 비슷한 개념으로, 주인집 한켠에 방을 얻어 사는 형태였다.

하늘을 떠받든다는 이름과 달리 그 시절 봉천동은 가난의 이미지가 강한 동네였다. 전축가게가 망한 뒤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중간 기억은 없다. 엄마 아빠에게도 좋은 기억은 아닐 것 같아 더 묻지 않았다.


이후 엄마는 남대문에서 오래도록 가게를 운영했고, 신당동의 작은 집을 구입하고 재건축을 거쳐 남산 끄트머리쯤에 있는 아파트의 소유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 집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했고 우리는 한 번도 그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 집은 굴리고 굴려 결국 상암동의 작은 아파트가 되었다. 그 사이 우리는 외할머니 집에서 외할머니와 이모까지 함께 모여 살았다. 복잡하면서도 편리한, 어딘가 애매한 모계 사회 속에서 나는 자랐다.


결혼을 하며 나는 다시 봉천동 고개 위에 신혼집을 얻었다. 마치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 연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봉천동에 집을 구할 때 시부모님은 넌지시 말씀하셨다.
“봉천동보다는 상도동, 관악구보다는 동작구가 낫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상도동이 좀 더 있어 보이잖아.”

우리가 구한 집은 봉천동과 상도동의 경계였다. 오십 미터 앞 길만 건너면 행정구역이 바뀌는 곳. 하지만 스물일곱이었던 나는 그 말이 너무 돈을 밝히는 어른들의 언어처럼 느껴져 어쩐지 새초롬하게 반응했다.


봉천동에서 봉천댁으로 긴 시간을 살며 신혼부부였던 우리는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그 사이 관악구의 전반은 차지하던 봉천동은 신사동, 행운동, 청림동 등으로 쪼개지고 이름이 바뀌었다. 달동네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였고, 결국 집값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미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봉천동의 작은 집에서 우리만의 낙원을 만들며 행복하게 살았다. 고개 위의 집은 집값이 잘 오르지 않을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 이렇게 행복한데 그런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가족이 늘어나는 사이, 우리는 동네 안에서 대출을 최대한 끌어안고 이사를 했다. 같은 단지 안에서도 가장 해가 잘 들고 구조도 잘빠진 32평 집이었다.

‘정남향집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살 수 있거든.’

하루 종일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며 집 안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며 괜히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서울 안의 작은 시골 읍내 같은 분위기의 동네에서 큰 아이를 낳아 초등학생까지 키웠고, 둘째도 태어나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둘째는 자연스럽게 누구누구의 동생으로 불리며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중학교 배정 문제와 여러 이유로 우리는 언덕 위의 낙원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여의도였다. 프리랜서 촬영감독인 남편의 일도 편해지고, 나이 차이가 많은 남매의 학교 문제도 한 번에 해결될 수 있었다. 게다가 한강과 공원이 가까워 언제든 뛰어나가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의도로 이사를 마음먹자 집값이라는 현실이 우리 앞에 놓였다. 정남향으로 하루 종일 햇살이 들던 32평 봉천동 아파트를 전세를 놓고, 우리가 여의도에서 구할 수 있었던 전셋집은 22평의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였다. 그래도 작은 방 창문으로 조각처럼 한강이 보였고, 거실에서는 mbc 부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그 자리에 결국 높디높은 건물이 들어오게 되지만, 그 이야기는 뒤에 하려고 한다.


넓은 집을 두고 해도 잘 들지 않는 작고 오래된 남의 집으로 이사를 오던 날은 3월 초였다. 뒤늦은 한파로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넓은 집의 짐은 아무리 정리해도 작은 집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정리를 하다 문득 내가 왜 내 집을 두고 남의 집에서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중앙난방이 들어오는지 마는지 바닥은 냉골이었고, 낡은 샤시 사이로 3월의 찬바람이 계속 들어왔다.

집 안에서 패딩까지 끼어 입고 짐정리를 하다가 저녁도 못 먹고 밤 열 시가 되어서야 허기가 밀려왔다.
“우리 힘들고 스트레스도 받는데 오랜만에 엽떡이나 시키자. 왕창 매운맛으로 소시지도 넣어서.”

이런 날은 역시 엽떡이다!
배달앱을 켰지만 여의도의 엽떡 매장은 이미 문을 닫았다. 가장 가까운 노량진점은 여의도로는 배달이 안 된다고 했다. 엽떡뿐 아니라 대부분의 야식집이 영업을 종료한 상태였다.

영업종료
영업종료
영업종료



아무것도 배달되지 않는 밤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바닥에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돌아갈 수 있는 나의 집이 없어진 기분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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