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전쟁, 생일 미역국 배틀
지난 주말, 아들 녀석과 미역국 끓이기 배틀을 했습니다. 어제 일요일이 와이프 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한 집에서 살아남으려는 남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의 단편입니다.
와이프 생일날 외식하고 현금박치기로 선물을 대신하는 것으로 끝낸다고요? 그렇다면 대단하신 생존력이십니다. 집안 경제력에 막강한 화력을 맡고 계시거나 천사 같은 와이프를 모시고 사신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저희처럼 어떻게든 와이프 심사를 안 건드리고 1년을 잘 버텨볼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이 일반적일 겁니다.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간 큰 남자임에 틀림없으십니다.
와이프 생일 전야에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한 지는 10년의 세월도 넘었습니다. 2012년 어머님께서 요양원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매년 와이프 생일 미역국을 끓여주셨는데 어머니께서 집에 안 계신 이후로는 제가 미역국 끓이는 담당을 하게 된 것입니다. 햇수로는 13년째 미역국을 끓이고 있으나 1년에 한 번 끓이는 미역국이라 매년 새롭습니다. 미역을 불려야 하나? 참기름에 볶아야 하나 들기름에 볶아야 하나? 소고기는 어느 부위로 사야지? 등등 매년 기억을 리부팅하게 됩니다. 그래도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젠 크게 고민 없이 마트에 가서 착착 미역국거리들을 사고 마른미역이 물에 불으면 양이 엄청나게 늘어는 것도 알고 있을 정도는 됩니다.
아무튼 지난 토요일 오후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미역국 끓일 마른미역 파우치와 국거리 소고기를 주섬주섬 사서 집에 옵니다. 마침 와이프랑 아들 녀석이 같이 나갔는지 집에 없습니다. 미역을 물에 담가 불리는 사이, 소고기를 냄비에 넣고 살짝 볶아줍니다. 그리고 물에 불린 미역을 물을 짜서 소고기와 함께 다시 볶아준 후 물을 냄비 가득 붓고 끓여줍니다. 간은 소금과 간장으로 미역국이 끓은 후에 맞추면 됩니다. 올해는 마늘 다진 것은 빼봅니다. 소고기 육향을 잡는데 마늘을 쓰는데 이번에는 마늘 대신 감칠맛의 병기인 다시다 조미료를 조금 넣어봅니다. 역시 아마추어 요리사의 실력을 감추고 돋보이게 하는 데는 최고입니다. 그렇게 저의 와이프 생일 미역국 끓이기 1차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대형마트에 같이 갔던 와이프와 아들 녀석이 집으로 들어옵니다. 생일준비한다고 과일이랑 이것저것 장을 봐왔습니다. 집으로 들어서던 아들 녀석이 "아! 미역국 냄새가 나는데!" 하면서 한소리 합니다. 자기도 마트에서 미역이랑 바지락 사 왔답니다. 조갯살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매년 와이프 생일 때마다 끓이던 미역국이라 아들 녀석에게 이야기도 안 하고 준비했는데 아들 녀석도 나름 엄마 생일에 뭐 할까를 고민한 모양입니다. 군대도 제대하고 지난해 시카고로 어학연수 다녀오면서 기숙사에서 음식 만들어 먹는 것도 익숙해진 탓에 생각해 낸 듯합니다.
그래서 예상치도 못했던 미역국 끓이기 배틀이 벌어졌습니다. 미역국은 이미 끓여놨지만 소고기 베이스이니 조갯살 미역국도 끓여보라고 합니다. 아들 녀석이 주방에서 열심히 뚜닥거리며 준비를 합니다. 바지락을 삶아서 조갯살을 준비하고 미역도 불리고 합니다. 제법 익숙하게 볶고 끓입니다. 자기만의 맛의 비법이라며 양파도 반으로 쪼개 넣고 끓입니다.
은근슬쩍 소고기 미역국보다 맛이 있으면 어쩌지?라는 쓸데없는 걱정도 됩니다. 미역국 끓는 냄새가 주방을 넘어 거실까지 실려왔습니다.
생일 전야 미역국 끓이기 대전의 마지막 맛 심사는 생일 당일인 어제 아침, 당사자의 심사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미역국은 맛이 우러나도록 한 소끔 더 끓이는 것도 비법입니다.
두둥! 와이프 생일날 아침상에 올라온 두 그릇의 미역국! 와이프는 어떤 미역국을 먹었을까요? 소고기 미역국일까요? 조갯살 미역국일까요?
푸하하! 어제는 남편의 소고기미역국의 승리였습니다. 아들 녀석은 아직 멀었습니다. 엄마가 미역국에 들어가는 소고기를 좋아하는지, 조갯살을 좋아하는지 판단에 미숙했고 결정적으로 양파의 반을 통째로 넣고 끓이는 비주얼에 실패해서 선택에서 제외된 듯합니다. 아니 뭐 와이프의 깊은 배려인지도 모릅니다. 오랜 세월 미역국을 끓여준 남편에 대한 측은함의 발로였기에 새로운 맛의 미역국을 먹고 싶었으나 그저 익숙한 소고기미역국을 꾸역꾸역 먹어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올 1년도 어떻게 와이프 밑에서 잘 버틸 구실을 조심스럽게 마련했습니다. 뭐 한 달도 못 가고 일주일도 못 가서 잔소리 듣고 "어이구 화상아!" 소리를 듣겠지만 그래도 일단 웃으며 출발을 해봅니다.
"아들! 조갯살 미역국은 내가 잘 먹었다. 맛은 있더라. 가을 내 생일 때도 끓여주면 감지덕지 잘 먹을게.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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