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그림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은 소공동의 웨스틴 조선호텔이다. 1914년에 세워졌으니 올해로 110년이 넘었다. 이 호텔에 가면 한 구석에 팔각형으로 된 건물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조선호텔 앞 정원의 부속 건물 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건물의 역사와 배경을 알면 놀라게 된다.
환구당(황궁우)
이곳을 환구단(圜丘壇)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는 황궁우(皇穹宇)라 부르는 것이 맞다. 환구단의 부속 건물이 황궁우다. 지금은 황궁우도 환구단이라 부른다. 환구단 본단은 일제시대에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삼층 팔각 건물 황궁우는 1897년 환구단이 조성된 후 2년 후에 세워졌다. 환구단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설치 되었다면 황궁우는 천신과 지신 등 여러 신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건물이다.
환구단을 지은 시기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황제로 즉위한 1987년과 일치한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곳이 이곳 환구단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황제라고 칭하고 일본은 천황이라 하면서 이미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였지만 우리나라는 중국의 속방이라 부르며 청나라의 제후국 수준에 있었다. 정상적인 외교관계,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종은 신하들과 주변 여러 나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곳에서 1897년 10월12일 황제국을 선포했고 나라 이름은 대한제국, 연호는 광무로 사용했다.
둘째 손자 주원이가 물었다. 왜 이곳에 설치한 건가요? 둘째 손자의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이곳은 소공동이라 부르는 곳이다. 소공은 작은 공주라는 뜻으로, 태종 이방원의 둘째딸 경정공주가 출가해서 살던 곳으로 남별궁이라고 불렀다. 공주의 남편이 조준의 아들 평양부원군 대림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중국 사신들을 많이 접대했다. 중국 사신들을 접대한 이곳을 헐고 오히려 중국과 대등한 천자국인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니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의 설명에 손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려운 역사 이야기를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손자는 내가 황궁우를 그리는 동안 옛 건물 속 높이 솟은 빌딩들만 이리저리 보더니 주변의 높은 빌딩들만 그린다.
두 손자는 나의 설명을 듣는둥 마는 둥 황궁우 옆의 높은 빌딩만을 그린다. 손자들의 눈에는 빌딩에도 표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이 없었을까? 고대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 있었다. 이후 고려 시대도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그래서 고려 성종이 즉위하던 983년 정월에 제천의식을 시행한 후 설치와 폐지를 계속 반복했다. 조선 초기에도 간헐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 있었지만 곧 중단했다.
높이 솟은 환구단을 쳐다보는 손자
나의 설명을 유심히 듣던 첫 손자 형주가 물었다.
“어째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중단한거죠?”
"하늘에 대한 제사는 황제국의 황제만이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天子)의 자격으로 지낼 수 있는 제사다. 고대에 이어 고려 초기까지는 우리나라도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면서 제천의식을 거행했지만, 고려 말 원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제후국 체제로 들어갔단다.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임을 공식적으로 표방해서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제천의식을 거행할 수 없었다."
형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이해했을까? 조선호텔에 남아있는 황궁우의 옆에 있던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둥글게 3단의 석축을 쌓고 맨 윗단에 황금색의 원추형 지붕을 얹은 형태였다. 예로부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라고 하여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 지내는 단은 네모나게 쌓았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황궁우에서 위패를 꺼내 환구단에 놓고 제사를 지냈다.
(좌)환구단, (우)황궁우
석고각
환구단 본단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철도호텔(현 웨스틴조선서울)을 지으면서 철거되었고, 현재는 환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궁우만 남아 있다. 그리고 3개의 돌 모양을 한 북이 남아있는데, 이는 1902년(광무 6년)에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설치한 석고단이다.
환구단의 황궁우는 서울 도심의 빌딩 숲속에 조용하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아 있어, 대한제국의 역사를 체험하고 회상할 수 있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나만의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적으로 지정된 환구단은 서울광장 근처에 자리 잡고 있어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6번 출구를 나와 올라오면 만날 수 있다.
[손자에게 들려주는 서울 이야기 ⑮] 빌딩 숲 속의 숨겨진 유적지 - 환구단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