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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성 Apr 07. 2022

우울도 중독이다

관성의 힘을 가진 우울.


    부정적인 감정으로 분류되는 슬픔, 우울, 외로움 등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감정들이 나에게 들어오면, 몇 번 씹다 뱉는 것이 아니라 곱씹게 된다. 긍정적인 감정은 보통 단물만 빼고 담배 연기처럼 내뱉게 되는데, 그놈의 나쁜 것들은 나도 모르게 질겅질겅. 껌처럼 휴지에 싸서 버리면 그만이련만 쉽지가 않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지 모르지만, 그놈들은 일종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에 빠지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슬픈 사람이 된듯, 우울에 빠지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환자처럼, 외로움에 빠지면 세상에 나만 흑백영화 촬영인듯. 불과 1에서 시작했던 감정은 2에서 3으로, 3에서 5로 번진다. 물에 빨간 물감을 떨어뜨린 마냥, 점점 극단적인 감정이 마음을 밀고 들어온다.


극복하고 싶은 의지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울증에 빠지면 보통 운동을 하거나 이유불문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들 한다.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우울증 환자들에게 해당 조언은 기만에 가깝다. 당장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은 무기력 상태에서 운동을 하라니, 씻고 밖으로 나가라니. 우리에게 '운동하기', '밖으로 나가기' 버튼이 있어 꾹 누르기만 하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울증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초석인데, 이미 감정에 휩싸여버린 상태에서는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 것이 부지기수다.


오히려 우울한 상태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우울한 모습이 나의 평소 모습일 수도 있고, 밖에 나가 잠시 웃고 떠들던 모습이 페르소나였을 수 있던 것이다. 어두운 생각에 안주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골은 점점 깊어진다. 이것이 바로 부정적 감정의 중독 상태의 핵심이다. 관성. 어두운 것은 더 어두운 쪽으로, 부정적인 것은 더 부정적인 쪽으로 향한다.


이 별난 중독을 우리는 방관해야 할까. 그게 결론이라면 나는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나마' 최선의 해결책은, 내가 중독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내가 우울하네'는 누구나 쉽게 알아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발을 디뎌 '내가 점점 빠지고 있네'를 눈치채는 것이 관건이다. 나는 '내가 우울하네' 상태에서는 스스로를 방관하기 십상이지만, '내가 점점 빠지고 있네'를 자각하는 순간 적어도 한 번 고개를 도리도리 하며 어느 정도의 감정을 털어내곤 한다. 이것만으로 5까지 갔던 우울이 4를 향하며 관성의 방향이 뒤집힌다.


나의 글을 눈여겨 봐주시는 독자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의식하는 것'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고이자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나의 감정을 의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직장, 학교, 인간 관계, 온갖 군데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을 제공하는 경직된 사회의 가운데에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눈치채주어야 한다. 특히, 그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을 알아챈다면 사실 우리가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를 한 것일지 모른다. 우울의 늪을 향하는 관성을 저버리기 바라며, 중독 상태에 들어가기 직전 찰나의 순간에 스스로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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