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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Jul 24. 2020

사랑에 서툰 사람들

요즘도 그런 숙제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 집은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와 그 이유를 쓰시오.' 그걸 생각해오는 게 과제였다. 그 숙제를 해온 날, 나는 우리 반 어떤 남자아이가 했던 발표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집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아빠가 엄마를 때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발표하며 결국 눈물을 글썽이던 그 아이.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지만, 그때의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만은 또렷하다. 가만히 생각을 떠올리 나는 아직도 목이 다.


당시 그 아이의 발표는 나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아빠의 가정 폭력사실보다 내게 적잖은 놀라움을 남긴 건 그 아이가 그렇게 솔직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꾹꾹 눌러썼더랬다. "우리 집은 행복합니다. 왜냐면 아빠가 군대 있을 때 얘기를 자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 시기에 나는 나름대로 힘든 꼬마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 노트에 써넣은 얘기는 머리를 짜내고 짜낸 한 문장일 뿐이었다. 내가 8살 때. 그러니까 엄마는 39, 아빠는 41세일 때 둘은 치열하게도 다퉜다. 아빠의 작은 오해로 비롯된 싸움은 아빠를 걷잡을 수 없는 상상의 나래로 이끌었고 그렇게 산불처럼 번져간 큰 싸움은 아무도 진화할 수 없었다. 세 자매 앞에서의 육탄전도 불사하던 그 싸움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싸우다 지쳐 가까스로 큰 불을 잡았나 싶으면 어느새 잔불이 정리되지 않아 다시 몸집을 키우곤 했다.


다섯이 일렬로 누운 단칸방, 내 자리는 부모님 바로 옆이었고 그 시기 새벽까지 이어진 다툼에 나는 잠에서 깰 때가 많았다. 어김없이 둘 간의 다툼, 주로 일방적인 아빠의 공격을 목격한다는 건 더욱 괴로운 일이었. 나는 마치 내가 가진 모든 슬픔의 근원이 그때 시작된 듯한 감정에 휘말려 말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누워있는 상태에서 내 눈 앞에 정면으로 보이는 유치원 졸업 액자 속의 내 얼굴이 울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고작 8살이던 내가 느낀 큰 좌절감 나의 무력감에서 비롯됐던 것 같다. 나는 큰 소리로 떼 한번 써볼 배짱도 없는 성격이었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정서적으로 압도된 상태였다. 언니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나는 그런 분위기를 따랐다.


엄마와 아빠, 둘은 우리들을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달리 방도가 없었는지 마지막 선택만큼은 피했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딱히 적절한 사랑법을 배우지 못한 채 조금은 건조하게, 늘 애증의 방법으로 투닥대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간다.


이제는 담담히 얘기할 수 있는 그때의 트라우마는 사실 청소년기, 심지어 청년기까지 나를 지배했고 줄곧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당시 내 부모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대다.

둘은 세 아이를 키운다는 것 자체가 버거운, 조금은 서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역시 유년시절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조차 몰랐다.


대물림된 그 서툶으로 인해 나 역시 참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상대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좋은 것을 주고 싶어도 결정적 순간에 못난 말이 튀어나갔다. 실수하지 않으려 경직되고, 편안하다 싶으면 실수를 했다.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열심히 그들의 사랑법을 배워나갈 수밖에 없었다. 좋은 이들의 행동과 , 표정과 리액션, 모든 것이 나에게 공부 거리였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진짜로 웃기거나 슬퍼야만 반응했던 내가 이러한 공부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시시한 얘기지만 그건 사랑하면 관심을 가지고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 엄마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요즘 사람들 툭하면 사랑한다는 말 하는 거 난 싫어. 소중한 말은 아껴야 더 가치가 있지"라고. 그리고 나도 그 말에 크게 동감을 했었다.

아무에게나 소중한 말을 남발한다면 그 말의 가치는 그만큼 깎이고 마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 이유에서 엄마와 나는 그 소중한 말을 여태 어지간히 아끼고 사나 보다. 그런데 나는 나의 또 다른,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여러 가지 소중한 표현들을 입 밖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말들을 마음의 확실한 증거로 내비치는 것, 그로써 서로 간의 관계에 풍요로움을 주는 걸 보게 됐다.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이든 입 밖으로 내뱉는 동시 내 귀에도 들려 남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도 입 밖으로 꺼내곤 한다. "잘했어",  "수고했어", "괜찮아",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마" 이런 류의 말이다. 생각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실제로 내뱉는 일은 꽤 효과가 있어서 스스로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신경 쓰이던 것을 괜찮게도 만들어준다. 그런데 하물며 상대에게 해주는 사랑의 표현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에게 관심이 있다. 너를 지켜보고 기대한다. 너를 믿는다. 너는 멋진 사람이다. 너는 재밌고 유쾌한 사람이다..." 상대방을 좀 더 관심 있게 지켜보고 구체적인 칭찬과 지지, 사랑의 표현을 맞춤형으로 해준다면 더 좋을 듯하다.


8살 때 같은 반이었던 그 남자아이의 부모, 그리고 내 부모가 혹시 이 소중한 말들을 너무 소중하게 아끼지만은 않는 분위기에서 컸더라면 어땠을까. 조금은 표현에 헤프고 수다스럽더라도 소중한 말을 남발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랬다면 그 아이가 울면서 발표하지도,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쓸데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재구성하며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현재의 현명한 선택으로 괜찮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쩌면 나의 8살보다 더 힘들고 아팠을 내 부모의 유년을 안아주려 한다. 여전히 내 안에 다 자라지 못한 서툰 아이가 있을지라도, 작은 포옹으로나마 나의 사랑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나를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사랑은 표현으로 완성되고, 표현이 서로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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