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도 육아처럼 36
남편의 최애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를 어쩌다 함께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이고... 추위와 더위는 기본이고 하나부터 열까지 자급자족해야 하는 불편한 일상이라니! 생각만 해도 심란해지는데 남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지나간 방송까지 찾아본다.
그 마음을 도무지 모른다면 내가 보고 싶은 채널로 휙 이동하련만,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도시를 떠나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자연인, 그분들이 대신 실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기에 내 앞에 놓인 리모컨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는다.
거의 득도의 경지에 올라 남편뿐 아니라 세상 고단한 가장들의 마음에 빙의해 TV를 보노라면 자연인이 되어 새 삶을 개척하는 분들도 훌륭하고, 심지어 꽤 많은 출연료를 받는 뽀글 머리 윤택 씨나 근육맨 이승윤 씨의 고생하는 모습마저 짠했다.
그런데, 그분들을 어느 날 실제로 마주친다면?
흠칫 놀라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토록 놀란 모습을 나는 너무나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저녁 8시쯤 샤워를 마치고 잠옷을 갈아입혀드리면 어머니는 한두 시간은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이런저런 소지품 정리를 하다가 주무시곤 했다.
그날은 침대에서 선잠이 들었다가 깬 것 같다.
우리 부부도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와서 큰 소리로
"얘, 00 애비 어딨냐? 이리 좀 와봐! 이게 무슨 일이니? 세상에!!"
"무슨 일이에요?"
깜짝 놀라 나가보니 어머니는 이미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방안을 가리키며
"저 도둑놈들이 내 집에 들어왔다? 내가 가라고 해도 꼼짝도 않고 말이야! 경찰을 불러야지 안 되겠어!!"
"네?"
방으로 들어가 보니 '나는 자연인이다' 재방송 채널이 켜져 있었다.
남편이
"엄마 이건 텔레비전이잖아, 이것 봐!(TV를 끄고) 없지? 아무도 없지? 누가 있다고 그래?"
하면서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소리야? 저 시커먼 놈들이 아까부터 쳐들어와서는 나가지도 않고 저러는데! 강도야! 강도!"
하며 망상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나는 얼른 어머니를 안아드렸다. 몸이 후끈하니 땀도 나 있었다.
"아유 어머니, 많이 놀라셨겠네요! 세상에, 진짜 무섭게 생겼죠? 이제 없어요! 다 갔어요!"
얼른 어머니 말씀에 호응하며 우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인지시켰지만 흥분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우리 같이 경찰서에 가서 다시는 못 오도록 신고해요."
라고 말하며 물도 한 모금 마시게 하고 다독다독 해드리니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며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등을 쓸어내리며 앞으로 어머니의 망상이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생길지 걱정하는 내 마음도 함께 쓸어내렸다.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불한당 같은 사람들이 완전히 떠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고
남편은 친애하는 자연인이 날강도로 매도당한 것 때문인지 똑똑한 어머니를 날강도 같은 치매에게 도둑맞은 것 때문인지 속상한 얼굴로 엉거주춤 어머니 곁을 지키고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