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도 육아처럼 42
마트 채소코너에 열무가 센터를 차지하고서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열무라는 이름은 '여린' 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는 열무를 '여름' 무라고 마음대로 생각한 지 오래고 굳이 바로잡을 생각도 없다. 바로잡는 순간 '여름 = 열무김치'라는 공식은 깨져 버릴 것이고 그러면 더위를 핑계 삼아 차일피일 김치 담그는 걸 미루다 열무김치 없는 여름을 보낼지도 모른다. ㅎㅎㅎ 이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따라 나는 조바심을 내며 열무 한 단과 얼갈이배추 한 단을 집어 들고 만다. 그리고 예정에 없던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사실 양으로나 공정으로나 겨울김장 같은 스케일이었다면 어림없는 일이다.
감자풀에 갖은양념을 넣고 소금에 절인 열무와 얼갈이를 버무린 다음 자작하게 육수를 부어 사나흘 익히기만 하면 완성이니 겁 없이 달려드는 거다.
열무냉면이나 열무비빔밥 같은 일품요리를 해 먹을 수도 있고 국 대용으로도 좋아서 만사 귀찮은 여름날 뚝딱 상 차리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편하게 상 차리기 수월한 아이템이라서 기필코 만드나 싶다.^^
여름먹거리의 필수템 열무김치는 어머니 식사를 준비하고부터 더욱더 애정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즐기셨다면 감동적인 러브스토리가 되었겠으나 현실은 편하게 한 끼 떼우기 위한 인스턴트 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후텁한 여름날, 열무냉면을 차려놓고 어머니가 한 입 드시기 무섭게
"어머니 어떠세요? 열무가 보들하니 맛있죠?"
날라리 며느리인 나도 열무김치를 담을 줄 안다고 은근히 뻐기며 물어보면
"응~ 괜찮네?"
표정을 보나 드시는 속도로 보나 그다지 호평은 아닌 반응;;;
그도 그럴 것이 자타공인 살림의 여왕인 어머니는 유명맛집 부럽지 않은 냉면비법 소유자이다.
어머니는 남편(고향이 이북이라 유독 냉면을 즐기셨다고 한다)을 위해 여름(아, 사철 대령하셨댔나?)이면 언제라도 냉면을 뚝딱 만들어내셨다고 한다.
쫄깃하게 삶아 건진 냉면을 그릇 가운데 소담하게 담고, 정성껏 끓여 기름기를 걷어낸 맑은 고기육수와 동치미국물을 황금비율로 섞어 차게 식혀서 얌전히 붓고, 무를 얇게 썰어 예쁘게 고춧가루물을 들이고 새콤하게 만든 냉면김치를 고명으로 얹은, 담백하고 구수하고 시원한 어머니표 냉면.
그 맛을 알고 있는 나로서 어찌 호평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맛있다고 하진 않아도 한 그릇 말끔히 비워주셨더라면 아니, 양이 많으니 좀 남기겠다고 하셨더라면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은 무엇 때문인지 어머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혼자 열무냉면을 드시게 했는데 좀 있다가 설거지하고 있는 주방으로 빈 그릇을 내어 오셨다.
"아이코 제가 내올 텐데 부르지 그러셨어요?"
"뭘? 이 정도도 못 들 줄 알고? 내가 얼마나 힘이 센데? 호호호"
어머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호평은 못 받았을망정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해 준 열무김치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 어머니 방에서 시큼하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킁킁,,,
'드러난 곳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지?'
옷장문을 하나씩 열어보다가 어제 먹다 남긴 열무냉면을 발견했다.
과일을 담아드렸던, 조금 움푹한 접시에 아슬아슬 넘칠 듯 담긴.
'으앗, 니가 왜 거기에?'
무더운 여름날, 장롱 속에서 하루를 보낸 열무냉면은 냄새도 형태도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악취의 정체가 그것일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할 수밖에.
더구나 분명 빈 그릇을 내어 오지 않으셨는가 말이다.
음식을 남기기가 아까웠는지 아니면 다 먹질 못했노라 말씀하기가 미안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이걸 왜 여기 두셨어요?"
"아.... 그거? 내가 이따가 먹으려고 뒀지!"
말씀은 그리 하셨지만 통 연유를 모르는 표정이다.
"음식을 이리 두시면 상해서 안 돼요!"
오만상을 찌푸리며 버리려고 갖고 나오는데 어머니가
"상하긴 뭐가 상했다고 그래? 내가 상한 것도 구분 못할 줄 알고? 그걸 왜 가져 가? 내가 먹을 거래도! 이리 줘!"
"조금 전에 식사하셨는데 배부르지 않으세요?"
"지금 말고, 좀 있다가 먹을 거야!"
큰 목소리로 화를 내는 모습이 심상찮아서 우선 화를 가라앉힐 요량으로
"예~ 마저 드시게요? 여기 있어요."
하며 드렸다.
어머니는 받은 그릇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시더니 장식되어 있던 도자기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 두셨다.
나는 방문을 열어둔 채 몰래 처리할 절호의 기회를 기다리며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보았다.
다행히 그때까지 상한 음식을 드신 적은 없지만 혹시나 드실 수도 있고 다른 데로 옮기려다 쏟을 수도 있으니 방심해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영 방을 비울 조짐이 보이지 않아서 슬그머니 아까 한 양치질을 다시 하시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호다닥 들고 나와 음쓰통으로 직행. 휴...
이번 여름에도 벌써 두 번째 열무김치를 담았다.
더운 나라에서 일하는 남편이 휴가 나오면 먹고 싶을까 봐 익히지 않고 김치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처음 담아 둔 것도 아직 바닥이 보이려면 멀었다. 뚜껑을 열고 국자로 국물만 떠서 작은 밀폐용기에 쪼르르 담았다. 열무는 정체만 겨우 알 정도로 가위로 잘게 잘라 조금 섞어 넣었다. 골절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 중인 친정엄마를 위한 것이다.
아픈 엄마의 얼굴에 이어 몇 달 전부터 요양원에서 비빔식으로 바꾸어 식사보조를 받고 계신 어머니도 생각이 났다.
늘 '나는 뭐든 잘 먹는다'고만했지 정작 뭘 제일 좋아하는지, 뭐가 먹고 싶은지 한 번도 밝히지 않았던 어머니...
짠한 마음이 찌르르 온 신경을 타고 돌았다.
암튼 열무김치는 썩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 뭐...
속으로 중얼거리며 김치통 뚜껑을 탁탁 힘껏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