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소 씨 Aug 31. 2022

우기 (1)



 금요일 저녁, 잠시 침대에 몸을 부려놓으려다 그대로 잠이 든 남자는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립선에 석회가 조금 생긴 것 같다는 건강검진 결과 통보를 받은 뒤로 밤마다 요의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만귀잠잠한 새벽을 굳이 떨쳐 일어나 여기가 차안이냐 피안이냐 경계 어렴풋한 심신으로 비척비척 화장실에 기어가 세찬 오줌을 갈기며 희열을 느꼈다. 옷을 갈아입을까 하다가 잠이 덜 깨기도, 사뭇 귀찮기도 했던 남자는 바지만 훌렁 벗어 발끝으로 냅다 던지며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그대로 둔 관능적인 외양으로 침대에 몸을 날렸고, 손깍지를 뒤통수에 받친 채 다리를 까딱거리며 다가오는 주말은 아내가 없을 것이므로 마음껏 일상을 어그러뜨릴 수 있다는 설렘을 담뿍 감미하다가 문득 핸드폰을 열어 웹툰들을 모아 보여주는 앱을 켰다. 컴컴한 중에 핸드폰이 발하는 빛이 남자의 얼굴에 기괴하게 고여 들자, 겨드랑이 틈에 웅크려 자던 개가 그걸 보고 깜짝 놀라 일순 아르르르- 감히 패륜적인 소리를 냈다가 딱밤을 한 대 얻어맞고는 토라져 냉큼 등을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다소 성급했던 딱밤에 대해 정중한 사과의 말을 전하며 개를 다시 겨드랑이 속으로 품어 보듬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저런 웹툰들을 오가며 끼적이던 남자는 원하던 게 없었는지 ‘요즘 웹툰계는 온통 학원물과 이異세계 마법소환물 일색인 듯, 이래서야 한국 웹툰이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까’라며 짐짓 대한의 대중예술계를 걱정하는 체 수고로운 만화가의 신경을 긁는 댓글로 해찰을 부리더니 별안간 쇠잔하게 잠이 들었다.     


 남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무언가 구상적으로 역한 맛과 향을 내는 물질이 남자의 입안에 틈입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남자에게 매우 익숙한 것으로 그가 키우던 개의 똥이었다. 남자의 개는 자기가 싼 똥을 굴리고 놀기를 좋아했고 때로는 먹기도 했는데,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나면 언제나 힘차게 달려와 남자의 입에 넣기를 시도했다. 물론 남자가 깨어있을 때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개는 남자가 잠들어 있을 때를 노렸다가 달려와서는 신나게 똥을 먹여주었다. 남자가 깨어났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에익! 에페페.     


*     


 남자 내외는 몇 개월 전 똥 먹는 개버릇을 고치기 위해 출장비가 이십몇만 원씩 하는 동물 행동교정 전문 훈련사를 부른 적이 있다. “훈련사님, 얘는 왜 자꾸 똥을 먹는 겁니까?” 남자가 물었다. “똥을 먹는 개들은, 의외로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며 똥을 먹습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고 똥을 싼 다음 그걸 다시 먹으면 영원히 배가 부를 것이라는 효율에 기인한 생각이지요. 그런 생각까지 하는 똑똑한 개는 흔치 않습니다.” 훈련사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입니까, 남자는 묻고 싶었으나 훈련사의 말 품세가 사뭇 진중하여 그냥 질문을 삼켰다. 남자의 아내는 “그런데 왜 남편한테만 똥을 먹이는 걸까요.”라고 물었는데, 훈련사는 그에 대하여 “글쎄요, 아무래도 남편분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고영양식을 섭취하길 바라는 마음 아닐까요?”라고 대답했고, 아내는 자신은 똥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남자는 그들의 개똥 같은 만담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똥을 남자의 입에 집어넣는 것 외에 달리 문제행동은 없는 것 같다는 훈련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만족하며, 그가 달라는 이십몇만 원을 쥐여 주고 서둘러 돌려보냈다.     


*     


 남자의 입을 공략하고자 연신 바시랑거리는 개를 몇 분간 꽉 끌어안아 붙드는 것으로 복수를 마친 남자는 개를 들쳐 안고 화장실에 데려가 자신의 입을 북북 씻고 개의 입도 벅벅 씻겼다. 입을 씻긴 것은 복수가 아니었으나 개는 그것까지 포함해 복수라고 여겼는지 땅을 치며 억울해했다. 입을 다 씻은 남자가 다시 침대로 몸을 날려 허우적 헤엄을 치며 부숭부숭한 이불의 감촉을 한껏 만끽하고 있는데 문득 벨이 울렸다. 누구지? 택배시킨 것도 없는데.


 -택배세요? 그냥 문 앞에 놓고 가시면 돼요.

 -택배 아니고요, 스프링클러 교체하러 왔습니다.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아내로부터 스프링클러 교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바는 없었지만 그건 그냥 그런가 보다 했고, 그보다 ‘택배세요?’라고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멀쩡한 사람을 택배 상자처럼 만들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전국의 오만 택배 기사님들께 왠지 모를 송구함을 떠올렸는데, 남자가 그와 같은 상념에 젖어있는 동안 한여름 송곳 같은 뙤약볕에 찔려가며 문 앞에 서 있던 스프링클러 교체 전문가라는 자는 더워서 숨지기 직전이었고, 그자가 신경질적으로 자지러뜨리는 벨 소리에 놀란 남자는 대강 손에 잡히는 반바지를 와당탕 주워 입으며 잽싸게 문을 열어 스프링클러 교체 전문가라는 자를 맞이했다.


 -어유. 미안합니다.


 비지땀을 흘리며 서 있는 스프링클러 교체 전문가는 언젠가 티브이에서 보았던 서아프리카 열대우림 저지대에 서식하며 버섯을 좋아한다는 성성이과 동물, 서부로랜드고릴라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그의 몸에선 땀과 함께 배출된 시큼한 남성 페로몬 냄새가 뭉근하게 피어올랐고 남자는 동성이 발하는 유혹의 향이 코에 스치자마자 같은 극의 자성을 맞댄 것처럼 아익 씨, 손사래를 치며 튕겨 나갔다.


 -뭐, 괜찮습니다. 한 이십 분 걸려요.


 남자가 에어컨을 ‘쾌속’으로 조절해 주자 스프링클러 교체 전문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에어컨 앞에 서서 열기와 수분과 남성 페로몬을 한껏 방사하더니, 대충 몸이 식었는지 박스를 뜯고 스프링클러 자리에 작은 사다리를 하나 세웠다. 남자는 ‘스프링쿨러’라고 언제나 생각해 왔는데 ‘스프링클러’라고 적힌 박스를 보고 뒤통수를 긁적이며 아무도 모르게 잠시 부끄러워했다. 전문가가 허리춤을 더듬어 복대를 찾았다. 거기 달린 지퍼를 움켜쥐고 좌에서 우로 북 긋자 빨갛고 파란 전선 줄기 따위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할복한 사무라이의 창자처럼 짜잔 튀어나오는 바람에 남자가 크게 움찔했다. 저기서 과연 뭘 찾을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볼트니 토막 전선이니 하는 것들을, 전문가는 전문가답게 쏙쏙 골라 뽑아내며 작업을 개시했다. 그러할 때 개는 낯선 사람이 낯설어 왕왕 짖었고 남자는 개를 끌어안은 채 교체 공사가 진행되는 이십 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궁리했다. 작업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기도 뭣하고, 다른 방에 가서 다리를 쭉 뻗고 티브이를 틀어보며 낄낄 웃기도 뭣하고. 결국 남자는 음료수라도 사다 줄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던 중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잠시 마주했는데, 잠을 자는 동안 뒷짐 지고 머리로 밭이라도 갈았던 것인지 머리카락이 북조선제 탄도미사일 로동 3호에 습격당한 까치집보다도 요란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남자는 나가려던 발길을 돌려 모자를 하나 집어썼다. 와이셔츠에, 반바지에, 멘 것도 푼 것도 아닌 넥타이에, 모자까지 들써놓으니 90년대 레게 힙합 가수 같은 복색이라 마음이 조금 복잡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집을 나섰다.

 편의점에 간 남자가 이온 음료 한 병을 집어다 결제대에 내려놓자 점원이 수상한 남자의 복색을 흘끔거리다가 남자를 알아보더니 아는 체를 했다. 어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아, 예 예. 이거 원 플러스 원이에요. 하나 더 가져가세요. 사모님하고 나눠 드시면 되겠네. 아, 예 예 수고하세요.


 음료수를 집어 든 남자는 달아나듯 편의점을 나섰다. 남자가 편의점에서 집까지 음료를 들고 뛰는 동안 대기와 음료수 사이의 온도 차에 의해 수증기 승화 현상이 발생했다. 음료수병 겉면에 물방울들이 조밀하게 들러붙어 흘러내렸고 그러한 과학적 인과로 남자가 사 온 음료는 실제보다 훨씬 더 시원해 보이는 외양을 갖추게 되었다. 시원한 외양의 음료를 받아든 스프링클러 교체 전문가는 “아유, 뭐 이런 걸 다.” 의례적인 겸양을 떨더니 꿀꺽꿀꺽 원샷에 깡그리 해치워 버렸다. 사무직 8년 차로 노상 사무실에 앉아 마우스를 깨작거리는 게 직업이었던 남자는 육혈포 같은 전동 드릴을 옆구리에 차고 전국의 누비며 스프링클러를 교체하는 삶의 양태와 그가 선보인 야성적인 음수가 어쩐지 멋지다고 느꼈는데, 음료수를 얻어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전문가가 스프링클러의 종류에는 퓨즈형, 유리 벌크형, 플래시형이 있는데요, 하는 소리를 시작으로 소방안전 상식을 거쳐 국회 법사위에 속한 모 국회의원이 부리는 곤조에 의해 장기계류 중이라는 소방기본법 개정안과 자신의 정치 성향에 관한 난데없는 고백까지 미주알고주알 주워섬기는 통에 멋지다는 생각을 취소했다. 육혈포를 차고 전국을 누비는 삶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외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네, 네, 적당히 대거리를 하다가 스프링클러 교체 전문가 양반을 그만 내보내고 싶다는 일념으로 제발 좀 가라는 말을 공손히 했다. 상호 면구스러워하며 잠시 침묵.     


 스프링클러 교체 전문가와 작별한 남자는 다시 침대에 몸을 날려 보았지만 이미 잠은 멀리 달아나 당분간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 몸과 마음을 싹 씻고 상쾌한 주말 오전을 도모해야겠다는 결의를 투철한 남자는 마침내 묶은 지 삼십여 시간이 지난 넥타이를 풀어 젖히며 화장실에 들어섰다. 눈을 감고 쏟아지는 뜨끈한 물을 가만히 맞으며 서 있던 남자는 별안간 깨달음을 얻은 시크교의 구루처럼 눈을 번뜩 뜨더니 고추와 항문과 겨드랑이를 중점적으로 호쾌하게 닦았다. 샤워를 마치고 스킨과 로션을 얼굴에 그악스럽게 문지르고 나니 비로소 백 퍼센트의 의식이 닻을 내리며 내가 돌아왔소, 하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아내는 남자가 로션을 그와 같이 마구 문대 바르는 걸 싫어했다. 그렇게 하면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며 톡톡 두드려 바르라고 잔소리를 하곤 했는데, 남자는 시범을 보인 아내를 따라 입술을 옹 오므리고 톡톡 두드려 보았으나 영 옹졸해 보여 아내가 있을 때만 그렇게 했고 없을 때면 그냥 벅벅 문질렀다. 문득 아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가볍게 적셨다가, 드라이어를 들이대자 증발했다.     


*     


 아내의 아버지는 바닷가 출신이었는데 그녀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바닷속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오락실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뒤 잠적해 버렸다. 장모는 아내를 필리핀에 사는 친척에게 보낸 뒤 아모레 아줌마, 삼성생명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 등 다양한 아줌마를 롤플레이하며 그녀의 뒷바라지를 했다. 아내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중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대학을 마쳤는데, 남자가 왜 필리핀에서 대학을 마치지 않았냐고 물으니 영어를 못 해서 그랬다고 했다. 영어를 못 하는데 어떻게 필리핀에서 살고 수업도 들었냐며 물으니 따갈로그어를 할 줄 안다고 말을 해서 사랑스러웠다. 아내는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탓인지 한국어에 조금 약했다. 이를테면, 언젠가 함께 바다로 여행을 갔을 때, 남자가 바다를 보며 “이야, 장관이네.”라고 하자 아내가 “어머. 여기에 장관님이 오셨어?”라고 하는 거였다.


 아내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남자의 장모는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암만 봐도 혼자 사는 것 같은데 요구르트와 우유를 지나치게 많이 배달시키는 어떤 사내를 알게 되었다. 그 사내는 사실 유제품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학계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그 사내가 유제품을 먹지 못하는 이유는 유당불내증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우유나 요구르트 따위를 계속 주문한 이유는, 그 사내는 장모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는데 정기 배송 품목을 늘일 때나 말을 붙일 수 있었으므로 제품을 늘려가며 과연 그녀에게 부군이 있는지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장모는 유당불내증 사내의 구애가 싫지 않았다. 이내 사랑에 빠진 그들은 이태쯤의 연애를 거쳐 재혼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유당불내증 사내가 남자의 장인이 되었다. 장인은 적당히 부유하여 장모의 여생을 책임질 수 있을 만한 재력을 가진 이였다. 장모의 재혼은 아내에게 좋기도, 나쁘기도 했는데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거의 팽팽했다. 좋은 점은 언제나 지난했던 엄마의 삶에 드디어 여명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아내가 엄마와 새아버지와 한집에 살기가 아무래도 좀 곤란했다는 것이었다. 밥을 먹다가 문득 숟가락을 던지고 엄마와 응큼한 행사를 한다거나,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빤쓰만 입고 엉덩이를 북북 긁으며 티브이를 보는 일이 새아버지에게는 아무래도 필요할 거라고, 아내는 짐작했다. 아내는 한국에 오자마자 대강 핑계를 만들어 일단 집을 나왔다. 회사를 다녀보려 했으나 면접 과정에서 모르는 한국말이 나올 때마다 주눅이 드는 바람에 합격했음에도 입사를 포기했다. 그리하여 아내는 서대문구 충현동에서 요구르트 배달 일을 시작했고 남자가 다니는 회사와 인근 건물들을 담당하게 되었다.     


 남자는 유당불내증이 있어 유제품을 먹지 못하는데도 요구르트를 많이 시켰다. 야쿠르트 아가씨에게 한눈에 반한 남자는 제품을 늘릴 때나 아가씨에게 말을 붙일 수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제품을 하나씩 늘려갔고 마침내 고백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야쿠르트 아가씨에게는 수작을 넘어 공작까지 부리는 남자들이 이미 상당했으나 요구르트를 잔뜩 사서는 주변에 전부 나눠주는 남자의 모습에 반해 그를 간택했다.     


*     


 샤워를 마친 남자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가, 싱크대를 일별했다가, 고개를 젓더니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배가 고파서 뭐라도 덥혀 먹을까 했는데 남자가 소유한 모든 프라이팬이 싱크대에 들어가 있었다. 일주일 째 설거지를 하지 않은 남자의 싱크대에는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걸 다 닦고 밥을 해 먹기는 귀찮고, 배달 음식은 또 별로 먹고 싶지가 않았던 까다로운 남자는 시장에 가서 적당한 요깃거리를 사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8월 한여름, 38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걸어서 왕복 사십 분이 걸리는 시장까지 다녀오는 일이 훨씬 수고로울 텐데 차라리 설거지를 하고 말지 이건 조금 미련한 짓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귀찮다는 감정이 반드시 운동량에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굳이 여기서 강조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는 경험 사실이므로 그런 면에서 남자의 판단은 합리적일 수 있다.     


 오전보다 억척스러워진 태양이 거리를 지글지글 끓이고 있었다. 발바닥이 뜨거웠는지 개가 걸음을 이상하게 팔딱거리자 잠시 지켜보던 남자는 결국 개를 들쳐 안고 시장으로 향했다. 남자의 개는 소위 ‘시고르자브’라고 불리는 시골 잡종 개로 모란 시장 인근에서 식용으로 길러지다가 유기견 봉사활동을 갔던 남자 내외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 녀석이며 구조 당시 그들과 함께 티브이에 잠깐 출연한 이력이 있다. 몸무게는 팔 킬로그램. K2 소총 두 정의 무게에 육박하는 남자의 개는 서부로랜드고릴라에겐 별것 아닌 무게였겠지만, 남자는 상당한 근육과 남성성을 상실한 8년 차 사무직에 불과하므로 고릴라와는 사정이 달랐다. 걷기 시작한 지 오 분도 못 되어 사방에서 난폭하게 끼얹어지는 뜨거운 공기에 남자의 이마에는 금세 땀이 맺혀 흘렀고, 흘러내린 일부가 눈을 찌르는 바람에 눈물까지 줄줄 흘려야 했는데 개를 들고 있어서 닦을 수도 없었다. 눈에 들어간 땀을 짜내기 위해 좌우 양 눈을 번갈아 윙크하며 걷던 남자의 입에서 으아 싯팔 더워 뒤질 것 같다, 상스러운 말이 절로 내뱉어질 때쯤 남자는 그냥 되돌아갈까 생각했다. 말을 번복하여 미안하지만 남자의 판단이 합리적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저쪽 골목만 꺾으면 시장이다, 나는 다 왔다, 다 온 것이다, 방백 같은 혼잣말을 뇌까리며 길바닥과 장절히 싸우던 남자는 마침내 승리했다.

 도착한 가게는 ‘봉춘이네 반찬’이었다. ‘봉춘 씨’가 누구신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걸었을 터인데 자부할만했다. 단순히 밑반찬만 파는 것이 아니라 계절에 맞춰 전어구이, 굴젓, 게장, 떡갈비, 겉절이까지 구색이 다채롭고 맛도 좋아 남자와 아내가 즐겨 찾던 가게였다.


 -어머, 깜짝이야. 오늘... 덥죠? 개까지 안고 고생하셨네.

 -아, 예. 조금요.

 -뭐 드릴까?

 -파김치랑, 계란말이랑, 마카로니 사라다 좀 주세요.

 -그런데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아, 예.


 남자는 아무렇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남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남자와 개와 파김치 중에 어느 것이 파김치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셋 모두 더위에 녹아 흐무러져 있었다. 남자와 개는 오전에 스프링클러 교체 전문가가 했던 것처럼 에어컨 앞에 서서 페로몬과 땀을 방사하며 몸을 식혔다. 햇반을 하나 돌렸고, 사라다와 계란말이와 파김치를 접시에 소담스럽게 올렸다. 냉장고를 뒤져 탄산수와 명란젓을 찾아 꺼냈다. 명란젓은 남자의 장모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장모는 전남 여수시 여서동 현대골든빌라 출신으로 숭덩숭덩 썰어낸 명란젓에 청양고추와 다진 마늘과 쪽파와 참깨와 참기름을 어어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무자비하게 넣어 무친 남도식 명란젓을 만들었는데 남자가 그걸 환장하게 좋아했다. 상을 차리는 동안, 남자는 어쩐지 장모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윤 서방. 윤 서방은 너무 애기 입맛이야. 만날 명란젓에, 사라다에, 계란말이가 뭐니.

 -아이, 몰라요. 맛있는 걸 어떡해요.


 장모를 떠올리며 밥을 씹던 남자의 눈에 느닷없는 눈물이 왈칵 고였다. 청양고추가 너무 매워서 그런가보다, 남자는 일단 그렇게 짐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명란젓을 아껴먹기 위해 아주 조금만 떠서 입에 털어 넣고는 명란 한 알 한 알을 혓바닥으로 살금살금 헤아려가며 장모의 손맛을 탐미했다.     

 단숨에 들이켠 탄산수에 힘껏 녹아있던 이산화탄소를 거윽, 하고 사출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친 남자는 그릇들을 싱크대에 넣어두려 했으나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넣을 공간이 없었다. 냄비나 그릇에 남아있던 잔반들의 부패가 진행되었는지 싱크대 근처에 가면 나쁜 냄새가 났다. 더 이상 설거지를 미룰 수는 없겠다는 결심이 선 남자는 결국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장엄하게 섰다. 이로써 남자가 시장에 다녀온 일은 미련한 행동이었음이 확실해졌다. 남자는 이참에 아예 냉장고 정리까지 싹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주말 동안 집을 비운 아내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동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