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소 씨 Aug 31. 2022

마블링 (5)


*           

 졸업식 따위에 별로 마음을 두지는 않았었는데, 내가 학사모 던지는 장면을 반드시 봐야겠다며 미주가 기차표를 끊었다는 말에 졸업식 날짜가 언제인지 찾아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졸업 날을 미주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신기해 할 즈음 엄마와 아버지도 광주에 내려왔다. 갑자기 웬일이야? 너 졸업식 보러 왔지. 미주가 알려줬어. 밀가루는 왜 들고 왔어요. 졸업식 때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아빠가 감옥에서 테레비를 많이 봤는데, 거기서 보니까 때 애들이 그거 뿌리고 사진 찍더라고. 아이 씨, 감옥 얘기 좀 하지마, 그리고 대학교는 그런 거 안 해요.

 생각보다 다들 나의 졸업에 관심이 많았었다. 행사라는 게 그래도 얼마간 의미가 있는 것이구나, 하고 느낀 게 막상 졸업장을 받고 사진도 찍고 탕수육 부먹, 찍먹으로 미주와 실랑이를 하며 짜장면도 한 그릇 해치우고 나니, 학생식당에서 밥을 훔치다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보내주어서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과 전공 책을 살 돈이 없어 도서관에서 보안 방지 바코드를 칼로 오려내고 전공 책을 훔쳤던 해묵은 기억 따위가 제멋대로 헤쳐 오르며 뭉클했다. 학교 재정을 멋대로 갉아먹었다는 사실은 별로 죄책감이 들지 않았고 바코드를 제거할 때 코를 기준으로 저자 교수님의 얼굴을 가로로 절반 잘라 뜯어내야 했는데 그 뒤로 교수님을 볼 때마다 조금 미안했다. 별로 써먹을 일은 없었지만, 과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내가 수석이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된 아버지가 또 절을 하려는 걸 말려야 했다.     

 과 수석을 했음에도 갈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축산학과라는 전공을 살려 얻을 수 있는 일자리에는 축산물품질평가원과 사료 회사 정도가 있었다. 축산학과에 입학한 순간부터 얼마간 예정된 진로였다. 전공을 선택할 때 내게는 진로에 관해 알려 줄 만한 어른이 없었으므로, 나는 졸업 학년이 되었을 즈음에야 내가 갖게 될 직업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동물을 먹이는 일을 하는 사료 회사에 취직하려 했으나 여자는 뽑지 않는다고 했다.

 축산기사 자격증을 따고 시험을 쳐서 축산물품질평가원에 취직을 했다. 연봉으로 보나 입사 경쟁률로 보나, 나는 별로 대단한 회사에 취업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공기업이라고 했더니 아버지와 엄마가 여기저기 자랑을 해 대는 통에 좀 창피했다.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 으응. 무슨 평가원이래. 우리 선이가 앞으로 뭘 평가하게 되나 봐. 아유 그러엄. 거의 공무원이나 진배없지. 아버지가 전화를 건 친척은 우리가 힘들었을 때 생활비 백만 원만 빌려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야멸차게 거절했던 집이었다. 그 집 아들, 그러니까 외사촌 오빠는 졸업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적 취직을 하지 못하고 집에 코끼리처럼 앉아있다고 했다. 덩치가 크다는 게 아니고 감정적 불편의 부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입사 전, 신입사원 연수라기엔 지나치게 간략하고 오리엔테이션이라기엔 상차림이 약간 더 풍부한 교육 시간을 애매하게 가졌다. 몇 되지 않는 동기들과 어색한 인사와 입사 스펙 따위를 주워섬겼고, 그나마를 또 쪼개서 신체활동이 동반되는 조별 게임 같은 걸 하면서 서로를 몹시 민망하게 여겼다. 삼 년에 한 번씩 순환 근무를 하게 될 것이며 전원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인사팀장의 설명이 있은 후, 다시 볼 일 없다는 점을 확인한 우리는 어색한 상태를 그대로 둔 채 비듬 같은 벚꽃이 떨어지던 낡은 운동장에서 단체 사진 한 방 박고 모호하게 헤어졌다. 나는 인사팀장의 설명을 들을 때 이런 생각을 하며 키득 웃었다. 아빠. 아빠랑 내 유전 정보에는 아무래도 역마가 코딩이 되어 있나 봐, 부녀가 대를 이어 순환 근무라니. 이 농담을 아버지에게 해 줘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가 접었다. 시험 삼아 미주에게는 말을 해 줬는데 전혀 웃지 않았다.

 품질평가원 업무의 절반은 도축장에 가서 고기의 품질을 평가하여 등급 도장을 찍는 일이고 나머지 절반은 농식품부 공무원이 요구하는 쓸데없는 자료들을 만들어다 바치는 일이었다. 출근 첫날은 사수 선배-라기엔 거의 열다섯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와 함께 도축장에 가서 인사를 돌았다. 처음 도축장에 입장했을 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예상을 했지만, 나는 또다시 나무들 사이에 숨어 구토를 했다. 갓 도축 당한 동물들이 내어놓은 피와 살과 지방이 만들어 내는 싱싱하고 비릿한 육내를 견딜 수가 없었다. 도축장 내 냉방장치가 아무리 온도를 낮춰가며 냄새 분자들의 이동속도를 떨어뜨려 놓아도, 도축장을 가득 메운 분자들의 어쩔 수 없는 과밀에 의해 숨을 쉴 때마다 한 움큼씩 피냄새가 숨길로 넘어왔다. 한 번 넘어온 냄새는 콧속 점막에 도포된듯했다. 도축장을 나와도, 아무리 콧구멍을 씻고 양치를 해도 숨을 쉴 때마다 뭉클하게 냄새가 느껴졌다.

 서천 도축장라는 곳이 꽤 넓은 편에 속하는 공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한한 것은 아니어서 보통 수준의 지리감을 갖춘 사람이라면 반나절 안에 그 구조와 윤곽을 파악하는데 무리가 없을 거야, 라고 선배는 만만히 말했으나, 방금 껍질이 벗겨져 숨결 같은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는 소와 돼지들은 당장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은 실재적 생명의 기척을 여전히 품고 있었고,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어 보이는 녀석들의 신체를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도무지 없었으므로 그 날 종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실눈으로 땅만 파며 강박적으로 걷는 바람에 퇴근할 때 서천 도축장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수 선배는 노박이로 헛구역질만 해대는 나를 보며 당분간 사무실 업무는 하지 말고 도축장에 출근해서 현장에 익숙해지는 것과 더불어 ‘에고(ego)를 버리고 오라’는 가열하면서도 철학적인 오더를 부과했다.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도축장에 있으면서 도축장의 내부 구조와 거기서 일하는 50여 명의 이름을 다 욀 때까지 사무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           

 ‘서천 축산물 유통센터. 무사고 48일째.’

 서천 축산물 유통센터라는 글자 현판이 큼지막하게 양각되어 올려져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무사고 48일? 불과 48일 전에 사고가 났던 건가.

 다음날, 나는 선배의 지시에 따라 새벽 다섯 시에 도축장에 도착했으나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단 입구에 쪼그려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조졌다. 도착했을 땐 사방이 어두컴컴했는데 어느덧 박명을 거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때 이른 기상에 몸이 놀랐는지 출근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얼굴에 개기름이 범람하며 때꾼해지고 있었다. 선배가 출근 인증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기 때문에 서둘러 들어가긴 해야 했다. 5분을 남겨놓고 여섯 시 딱 되면 들어가야지, 여섯 시 딱 되면 들어가야지, 하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트럭 두 대가 들어서더니 화물칸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름을 외워오라는 사수 선배의 지시가 떠올랐다. 찾아가서 물어보긴 쑥스럽고 대충 비벼 섞여 있다가 주워들어 볼 속셈으로 그들 무리에 다가갔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한국인이 절반쯤, 조선족, 우크라이나인, 캄보디아인, 그 외 국적을 알 수 없는 외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우크라이나, 캄보디아, 그 외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며칠 안에 외워오라는 건 직장 내 괴롭힘에 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선배는 단호한 편이긴 했으나 못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 아마 그런 걸 바란 것은 아니었을 테다. 어쨌거나 같은 도축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니 주의 깊게 살펴보긴 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동족-한국인은 한국인끼리, 조선족은 조선족끼리, 캄보디아인은 캄보디아인끼리- 간에만 몇 마디 나누며 비척비척 줄을 섰다. 반장인지 십장인지 그런 역할을 하는 나이 많은 사람이 줄을 선 사람들에게 패딩을 두 개씩 나눠줬다. 핫팩도 두 개씩 나눠 줬는데 하나는 바로 까더니 가슴팍에 넣었다. 어제 내가 도축장을 돌 때는, 내부가 춥긴 했지만 패딩을 두 개씩 겹쳐 입고 핫팩을 반드시 가슴께에 장착해야 할 정도로 춥지는 않다고 느꼈는데 생각해보니 그들은 고기와 내장을 씻기 위해 무시로 물에 손을 담그거나 끼얹거나 해야 했고 있는 힘껏 냉기를 뿜는 기계장치들과도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챙겨 입는 것 같았다. 그다음에는 긴 장화를 신었고, 그다음에는 영화에 나오는 살인범들이 입고 다닐 법한 레인코트가 주어졌다. 용도는 영화와 비슷한 듯하다. 몸에 피가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

 “누구세요?”

 주춤주춤 그들의 곁을 맴돌고 있는데 아까 십장 역할을 했던 노인이 내게 물었다. 나는 명함을 내밀며 축산물품질평가원에 입사한 신입사원이라고 소개를 했다. 그가 씩 웃었다. 이가 몇 개 없어서 군데군데 검은 잇새가 드러났다. 자신은 이 도축장에서 30년째 도부로 일하고 있으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을 했다. 품질평가사와는 별로 부딪힐 일이 없으니 친하게 지내자는 말도 덧붙였는데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멀뚱히 서 있다가 나중에 알아차리고는 아아, 하며 넙죽 인사를 했다. 그들이 옷을 챙겨입는 사이 소와 돼지를 실은 트럭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오늘 도축될 녀석들일 것이다. 도축. 도축이라는 말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살해’ 내지는 ‘살육’임이 분명함에도 죄책감을 외면하기 위해 만들어 낸 낯선 말 같아 야비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도 똑같이 야비하여 언제나 도축이라는 상냥한 단어만을 사용한다.

 동물들을 싣고 온 트럭 뒤켠에 널판이 얹어졌다. 농장주들이 소를 끌어 내렸다. 몇몇은 자신의 앞날을 예감하지 못했는지 순순히 내려갔고 몇몇은 음머하며 울기만 할 뿐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 제대로 보았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내려가지 않은 소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녀석을 본 듯도 하다.     

 동물행동학자인 경상대 수의학과 연성찬 교수는 “소는 (비명)소리·추위 등을 통해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며 “음성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해 소리를 통해 동료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학대를 받거나 공포가 밀려오면 소리를 질러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전한다는 것이다. 눈물도 이 같은 상태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교원대 생물교육학과 박시룡 교수는 “살처분 현장에서 접할 수 있는 소들의 눈물과 울음소리는 일종의 ‘디스트레스 콜(disstress call, 나쁜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이라며 “새들이 위험이 닥쳤을 때 소리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소의 눈물 대부분은 감정과 무관하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대 수의대 황철용 교수는 “눈이 큰 소는 사람보다 안구 자극물질에 더 자주 노출된다”며 “사람처럼 실내생활을 하지 않고 밖에서 지내므로 눈에 잦은 자극이 가해져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설명했다.

(출처 : 중앙일보 / 2011.01.08.)


 “저게 뭐예요?”

 농장주들이 막대기 같은 걸 꺼내 조립을 했다. 나는 십장 영감에게 물었다.

 “뭐긴. 전기 충격기지.”

 내려가지 않고 버티는 소들을 농장주들이 전기로 지져대자 근육이 뒤틀린 소들은 온몸을 통째로 꼬집혀 버린 것 같은 기이한 모양이 되더니 자극이 풀리자마자 화들짝 놀라 후닥닥 내려갔다. 내려간 다음에는 좌우로 정렬, 좌우로 정렬. 월례 조회 교장님 훈화 말씀 시간에 구령대 앞에서 학생들이 정렬하듯, 소들이 죽음 앞에 정렬했다. 정렬은 전기 충격기에 의해 손쉽게 이루어졌다. 정렬이 완료되자 하나씩 계류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계류장 근처에서,

 ‘타앙!’

 하는 소리가 힘있게 울렸으며 그 불길한 음파는 어딘가에 반사되어 다시 한번, 또다시 한번 그렇게 메아리가 되었다. 메아리가 아스라이 사라질 때쯤 다른 녀석을 향한 ‘타앙’ 소리가 또 한 번,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들려왔다. 지독히 효율적인 절명의 소음이 울릴 때마다 나는 픽픽 쓰러지는 송아지들이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와 동시에 가슴이 후들거리며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게 되었다. 눈물이 불쑥 솟았는데 도축장에서 일하는 주제에 값싼 눈물로 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소진하려는 내가 또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장 영감이 나를 물끄러미 굽어보다가 제 갈 길을 가버리더니 대뜸 돌아와서는 어깨를 톡톡치고 시뜻하게 말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블링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