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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03. 2022

찬란하도록 슬픈

관극일지 네이처 오브 포겟팅

아빠! 남색 재킷, 빨간색 넥타이는 주머니에 넣어둘게요

2022.04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고 싶은 봄

 뮤지컬 팬레터 이후 다양한 극들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이 극의 경우 이윤 역할을 통해 단숨에 내 마음에 들어온 김지철 배우님의 차기작이었다. 이 극은 피지컬 시어터라는 장르로 분류되어있다. 생소한 이 장르는 움직임으로 이야기를 표현해낸다. 그래서 배우들은 말은 하지만 마이크가 없어서 모두에게 명확히 들리지 않고 사실 그 대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극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오롯이 음악과 배우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처음 이 극을 본 날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대사가 없어도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구나. 70분 정도의 시간 동안 두 명의 연주자들과 네 명의 배우들은 쉴 틈 없이 움직인다. 극이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배우님들의 살이 실시간으로 빠져가는 것이 보일 정도라 차마 연장해달라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오롯이 배우들의 힘으로 진행되는 극이 바로 이 극이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하 네오포)은 치매 환자의 이야기다. 김지철 배우님이 맡은 톰은 55세 생일을 맞이한 조기 치매 환자이다. 그리고 딸인 소피가 아버지에게 남색 재킷과 빨간 넥타이를 매라고 이야기하고 거기서부터 톰의 기억은 과거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재킷이라는 포인트에서 시작하여 후에는 빨간색으로 상징되는 이자벨라의 기억까지 톰의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퍼즐처럼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에 있는 나무 무대에 오르고 내리는 과정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기억들의 공간이 왔다 갔다 하고, 의상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람에게 기억은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는 향으로 기억을 하고 누군가는 음악으로 기억을 하고 누군가는 계절로 기억을 하고,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는 다양하다. 다만 그 기억이 영원하지 않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작용을 한다. 2019년 처음으로 취업을 하고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냈다. 그리고 코로나가 왔다. 남들 앞에서 서서 설명하던 일을 하던 내가 처음에는 여전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그래도 앞에 서면 입은 떠들 수 있을 것 같았고,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있는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없어졌다. 그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무력함이란. 중간중간 나는 톰에게 많은 것을 공감하게 되었다. 특히 톰이 수학 선생님으로 등장해 설명을 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옴을 보며 덜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으로 학생 앞에 서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라버렸고, 코로나 이전에 사람들 앞에서 설명을 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아니라 입이 떠들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온다. 그게 누군가는 위대한 작품이라 칭하는 것 앞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순간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그 앞에 선 내가 입으로만 떠든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그것이 나에게는 숨 쉬는 일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운 기억에서 톰은 버려져간다. 그리고 문제는 그 기억이 단순히 일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기억에게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사람의 기억 저장소의 용량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저장 공간 안에서도 특수한 순간들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 순간이 그리고 누군가를 살게 하고 또 죽게 한다. 톰은 극 내내 이자벨라에 대한 기억으로 살고, 또 죽어간다. 톰이 자신의 딸 소피를 바라보며 이사벨라의 이름을 부르고, 재킷을 입으라는 말에 집어 든 재킷은 과거 학생이었던 시절로 톰을 돌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사벨라로 가득하다. 이사벨라가 쪽지를 주던 순간, 함께 자전거를 타던 순간, 첫 키스의 순간,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결혼식을 하고 소피가 태어나고 그리고 싸우고 마지막으로 이사벨라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순간이 톰을 과거로 불러온다. 그런데 그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 순간순간 톰은 현재로 돌아오고 그 순간 다시 톰을 과거로 불러오는 것은 다시 한번 이사벨라의 쪽지 혹은 이사벨라의 키스다. 이사벨라의 죽음은 직접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다만 다투다가 이사벨라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으로 조명과 연기를 통해 묘사된다. 자신의 찬란했던 모든 순간을 채우고 있는 이사벨라와 온전한 헤어짐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사고, 심지어 다투다가 그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 때의 톰의 절망이 너무 여실히 느껴진다. 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총 3번 묘사가 된다. 늘 사고가 나는 순간 톰은 현재 혹은 과거로 돌아가 상황을 반복한다. 그런데 마지막 묘사에서는 톰만이 그 기억의 공간에 남아 이사벨라를 찾다가 이사벨라에게 키스를 한다. 그리고 무대 아래로 내려와 짓는 표정과 그 눈빛은 이사벨라의 죽음을 비로소 떠올린듯하다. 그런데 그걸 보면서도 후련하지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톰은 이사벨라의 죽음을 기억하고 떠올려야 할까. 어떤 시간 동안 이사벨라와 사랑에 빠지고 다투고, 떠나보내고 그 죽음을 다시 직면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마 네오포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때의 철톰의 장면이 떠오르리라.


 이 극은 톰이 과거의 기억을 오가며 혼란스러워하기 때문에 아주 그냥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극이다. 그 절정에 달하는 것이 결혼식 장면도 아닌 자전거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에서 톰은 엄마의 애정 어린 배웅을 받고, 이사벨라를 태워 자전거를 타며 그 순간을 만끽한다. 와중에 이사벨라는 갑자기 톰에게 뽀뽀를 하고 그 순간 옆에서 달리고 있는 톰의 모습과 표정은 너무나 사랑에 빠진 모습이라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답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뽀뽀를 하고 부끄러워하고, 나중에 등장한 마이크와 장난을 치는 그 모습은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혹은 이제 막 사랑에 빠진 그 풋풋함이 느껴져 저절로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아마 톰의 가장 찬란한 순간 가운데 하나겠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아름다운 기억들은 그저 이런 사소한 순간들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내가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듯이, 톰도 그러했겠지. 그런데 그 기억에서 버려지는 순간이 온다. 결혼식 피로연 장면에서 톰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엄마, 이사벨라와 마이클이 점점 몸이 무너져 내리고 이를 톰은 필사적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걸 보는 나는 또 무너져 내린다. 


 사실 무엇보다 나를 그 극에서 울게 만들었던 건 마지막 부분에 들어서면서 무대에서 4명의 배우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걸어 다니는데 처음에는 톰이 이사벨라를 찾는 것처럼 연출이 된다. 엄마에 대한 기억, 마이크에 대한 기억이 아닌 이사벨라와 함께했던 순간의 기억들을 되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각기 다른 방향을 보며 걷는 배우들이 어느 순간 톰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고 있다.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왼쪽에 앉았던 나에게 마이크 배우가 톰을 부르는 입모양이 보이며 마이크 배우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보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톰만이 그 기억들을 찾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기억들 역시 톰을 찾고 있었구나. 나의 기억들 역시 나를 찾고 있을까.


 이사벨라의 죽음이 묘사될수록, 그에 대한 생각이 많아질수록 잘 헤어지는 것에 대해 생각을 자꾸 하게 되더라. 사람은 늘 이별을 한다. 그게 가족이나 혹은 연인같이 오랜 시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내어준 사람에 대한 이별은 늘 크게 다가온다. 근데 그 이별을 온전히 끝내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 혹은 뭐라 정의하기 힘든 감정들은 오랜 시간을 괴롭혀온다. 그래서 자꾸 보는 내내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와의 이별이 내 기억 속에 있는 가장 강렬한 이별인데 할머니하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날이 어디 캠프를 갔다가 친구들이랑 놀고 싶었는데 가족 식사 때문에 못 놀고 식사 자리에 갔어야 했던 날이었다. 그래서 살짝 짜증을 냈었고 얼마 후 할머니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울지도 못할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고, 장례식 기간 내내 울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 생각을 하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아마 톰도 그렇지 않았을까. 이사벨라와의 마지막은 다투는 장면이었다. 이사벨라가 사고 직후 바로 사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 그 순간이 톰에게는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라 자꾸 그 기억으로 문득문득 돌아가게 됐던 것 같다. 얼마나 미안하고 후회되었을까.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얼마나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결혼식 피로연 장면 가운데 이사벨라가 사랑해라고 이야기하고 톰이 나도라고 답하며 둘이 웃는 장면이 있다. 아마 자꾸 이사벨라의 죽음 장면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음껏 사랑하여 떠나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랑을 하는 것도 너무 중요하지만 잘 헤어지는 것 역시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모습이 그 사람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기억이기도 하니까. 사랑하는 동안 열렬히 사랑하고 그리고 잘 헤어지는 것, 우리가 삶을 살아가내는 동안 기억해 두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이 극이 처음 시작했을 때 극장 로비에는 퍼즐이 하나 있었고, 관객들이 티켓을 수령할때면 퍼즐을 하나씩 주어 그 퍼즐판에 직접 붙여 퍼즐을 완성하는 이벤트가 준비되어있었다. 마지막 날 공연이 끝나고 나서 본 퍼즐판은 다 채워져 있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이것마저도 이 극의 일부이니 마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라고 이야기를 건네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극을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에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채 다같이 로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의 그 마음은 이 멋진 극을 떠나 보내기 아쉬운 마음이었겠지. 


 네이처 오브 포겟팅, 우리는 늘 현재 진행형으로 무엇들을 잊어간다. 그 극을 보고 난 직후의 기억과 감정 역시 사라져가고 퇴색될것이다. 찬란하도록 슬픈. 이 극을 보는 내내 머리를 채우고 있는 감정이었다. 나의 하루가, 그리고 당신의 하루가 비록 먼 훗날에는 아스라히 흩어져 슬픔으로 남게 될지라도 최소한 그 순간을 살아냈던 우리에게는 그 순간이 찬란하지 않았을까. 당신을 채우고 있는 그 기억들이 다시 한번 당신을 찬란하게 만들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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