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이번 호주의 겨울은 정신을 못 차리겠다.
이별 후폭풍이 이제야 왔고, 박사 학위 제안서 글은 전혀 써지질 않는다.
요즘 내가 하는 생각은..
내가 삶을 제대로 잘 살아왔는가?이다.
나는.. 잘하고 있는걸까.
내가 원했던 삶과 지금의 삶의 모습은 매우 다르다.
어쩌면 지금의 삶이 훨씬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바라고 꿈꾼 여성의 삶과 너무 다르니까..
뭔가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걸까..
더 늦기 전에 되돌아가야하는걸까라고 생각하다가도 내겐 되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걸까.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뭐.
필자는 슬프고 우울할 때에 쇼핑을 간다. 특히, 식료품 쇼핑.
가장 좋아하는 곳 중의 하나는 내 스튜디오 근처에 있는 채소 과일 가게와 함께 있는 이탈리안 식료품점.
이곳에서 좋은 재료를 사서 나 자신만을 위한 요리를 할 때면.. 좀 힐링이 된다.
이 날은 호주에서 처음으로 낑깡(금귤)을 발견하여서 너무 반가웠었다. 잘 기억 안 나지만 어릴 때에 보고 먹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가게에서 일하는 잘생긴 청년이 말했다.
"엘레인, 궁금하면 그거 먹어봐도 돼. 저쪽 지역의 농부가 집에서 키우던 것을 가져온거야."
아, 씻지도 않은걸 입에 물기에는 찝찝했지만.. 맛이 너무 궁금했다.
옷으로 쓱 닦고, 낑깡을 한입 와작 깨물었다.
"아우, 셔!!!!"
난 신 것을 유독 못 먹는 사람인데.. 잔뜩 찌푸려진 내 표정에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꺄르르르 웃었다.
"알아, 나도 처음 먹었을 때에 첫맛이 너무 셔서 깜짝 놀랐어. 근데, 계속 씹어봐. 그럼 정말 또 다른 맛이 나.
날 믿고, 계속 씹어봐.“
어?
씹을수록 씁쓸한 낑깡의 맛이 매우 조화로웠다.
"하나 더 먹어봐도 돼?"
"다 먹어도 돼. 맛이 묘하지???"
뭐지? 첫맛은 시지만.. 씹을수록 이 씁쓸한 껍질의 맛이 매력적이었다.
결국 한 봉지 가득 담았는데, 그 청년이 가게 사람들에게 으쓱거렸다.
"그리고 오늘 퀸즐랜드에서 새로 딸기가 들어왔어. 네가 저번에 그랬지? 호주 딸기 너무 맛없다고..
한국 딸기만큼 설탕맛은 안 나겠지만 이 딸기는 진짜 맛있는 거야."
그의 말을 믿고 딸기를 집으러 갔는데, 다시 그 청년이 다시 나를 불렀다.
"맨 뒤에꺼 집어. 맨 뒤에 거가 제일 신선한 거야.
지금 내가 너 케어해 주는 거 알고 있지??? 난 널 챙겨주는 거야."
응? 고.. 고마워.
맨 뒤에 있는 딸기를 두팩 집어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솔직히 호주 딸기는 정말 더럽게 맛없다. 한국 딸기 못 먹어 본 지 10여 년이 넘었기에.. 이젠 한국 딸기맛이 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호주에서 온갖 비싼 딸기들을 먹어봤어도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이번에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그냥, 나쁘지 않았다. 역시, 호주에서는 딸기만 생으로 먹는 날이 오기는 힘들 것 같다.
불쌍한 호주 사람들.. 한국 딸기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 맛있는 것을 모르다니!!!!
진짜 난 내가 능력이 되면.. 한국 딸기 종자를 호주에 들여오고 싶다..
어쨌든, 오늘도 생으로 먹기에는 내 입에는 좀 무리이기에..
부라타 치즈 위에 딸기를 썰고.. 올리브 오일 조금, 소금 조금, 후추 조금..
그리고 화룡정점으로 얼마 전에 구입한 끈적한 발사믹 식초를 쭈욱 뿌려주었다.
아, 이제야 먹을만하네.
올리브 오일이 떨어지면 왠지 나는 너무 불안하다. 그만큼 올해 무척이나 집착하게 된 건 질 좋은 올리브 오일이다.
최근에는 호주에서 최애 소금들도 발견하였는데, 그 소금들로 인해 내가 만든 요리들을 더 애정하게 되었다.
몇몇 친구들은 이런 내가 이상하다는데.. 그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애정하는 것들을 애착하는 것뿐이다.
그게 지금 내 삶에서 소소한 재미이고, 즐거움의 한 부분이니까.
이 날은 야채가게에서 공짜로 준 감에다가 푸르타 치즈랑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 넣어서 먹었는데.. 신세계였다.
참고로.. 여기 야채가게 사람들은 나를 예쁘게 봐주는 듯. 특히 짧은 금발머리 아주머니랑 종종 인사를 하는데.. 아주머니한테 제품들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어보면 매우 즐거워하면서 추천해 주시고 답해주신다. 저번에는 뜬금없이 아주머니가 그 귀한 신선한 트러플 버섯 작은 거 세 조각을 공짜로 내게 줘서 놀랬었다. 조만간 내가 만든 도자기 갖다 드려야지!
이번에 구입한 닌자 에어 그릴로 통닭구이도 해 먹고.. 포크 립스도 해 먹었다.
왠지 내 요리 레시피들이 업그레이드된 기분.
아, 근데.. 이젠 남자가 없네. 난 왜 싱글이지?
겨울이니까.. 따뜻한 야채수프가 항상 당긴다.
셀러리를 생전 안 먹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 안 좋아하던 음식들이 땡기면서 입맛이 바뀌었다.
먼저 올리브 오일에 양파랑 당근, 샐러리를 작게 썰어서 볶아주고.. 토마토 캔을 넣는다.
거기다가 카펠리니(하얀색 콩,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콩.. 너무 맛있다.) 캔을 한통 넣어준다. 폭 끓인 후에 접시에 담아서 올리브 오일 한 바퀴 빙 둘러준 후에 먹으면 완전 힐링이다.
왠지 이거 먹으면 살 빠질 것만 같은 건강한 맛인데.. 재료들의 풍미가 서로 어우러지고, 올리브 오일이 신선함을 추가해 줘서 내가 좋아하는 수프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칠리랑 파스타 넣어서 먹어도 완전 극락이다.
향이 강한 올리브 오일은 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풀내음 나는 강한 맛의 올리브 오일이 너무 좋다.
친구가 싱가포르에서 사다준 야쿤 카야 버터를 브리오슈 번에 발라서 버터랑 먹었다.
처음 먹어봤는데, 꽤 맛있더라.
하지만 또 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가 다 아는 살찌는 맛.
냉장고에 있던 김밥도 구워서 먹고.. 요즘 식단관리 꽝이다.
스튜디오에 갔다가 우울한 날, 차 안에서 혼자 초밥을 점심으로 먹었다.
연어랑 아보카도가 들어간 초밥은 언제나 맛있지만.. 유부가 들어간 라이스페이퍼롤은 진짜 별로였다.
몇 달 전에 여기서 그 사람이랑 아주 드라마를 찍었었음..
저 돌담길은 교회 담장인데, 저 교회 안이 무척 예쁘다.
식료품 점을 가기 위해 지나갈 때마다 생각나서 짜증 나지만.. 항상 그 사람이 나에게 말했듯이 "Past is the Past."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
XXX.
원팬 파스타라는 것을 해봤는데, 스트레스받은 날이라서 우유에 불닭 소스를 넣었더니.. 정말 힐링이었다.
그동안 아파서 매운 거 못 먹었었는데.. 이거 먹고 왠지 속이 풀리는 기분.
역시 난 한국 사람이 맞는구나.
그리고.. 유기농 피칸 파이.
정말 정말 정말.. 맛있게 먹었다. 어릴 적에 경기도에서 살았는데, 동네 빵집에서 먹었던 호두파이랑 맛이 비슷해서 매우 반가웠다.
포카치아랑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조화는 정말 최고다. 화려하지 않고 심플하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이렇게 글 쓰고 보니.. 우울하다면서도 나 꽤 잘 먹고 잘 사는구나 싶다.
오늘 내 기도는.. 하나님,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잘 해낼 수 있는 에너지를 주세요이다.
그동안 너무 축 쳐졌고.. 우울했는데.. 내일은 즐겁고 기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기적이 별거인가.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이 기적일 수도 있는 거지.
파이팅, 잘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