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스승님, 글렌과의 추억.
글렌 바클리(Glenn Barkley)는 호주 시드니와 베리(Berry)라는 뉴사우스웨일즈 지역의 시골 동네를 오가며 거주하는 예술가 겸 글 쓰는 작가, 큐레이터이다. 그중에서도 그의 가장 중요한 직업은 아내 전용의 정원사라는 타이틀이다.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호주 현대 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 이하 MCA)의 초기 수석 큐레이터였으며, 화려한 경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글렌은 스스로를 예술과 예술가들의 팬으로 자신을 묘사하며, 호주 예술과 문화에 대해 광범위한 지식적인 글들과 책을 쓰고는 한다.
이러한 경력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까지도 매일매일 작업에 매진하며 도자기를 만드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글렌 바클리는 시드니의 뉴사우스웨일즈 대학교, 울룽공 대학교, 호주 국립 미술 학교 등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글을 쓰고 있는 필자 본인도 글렌 바클리와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는 제자 중의 하나이다.
호주에서 처음 뉴사우스웨일즈 미대에 갔을 때의 그 긴장감이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20대 후반에 취미로 시작했던 미술로 고작 1년 반 만에 미대까지 가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건 정말 레전드였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1년 크레딧 트렌스퍼(Credit Transfer, 한국으로 말하자면 편입)를 받아서 나는 미술은 중간 과정에서 시작했는데..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내려놓고.. 페일(Fail)만 하지 말자.. 졸업은 안 해도 되니 이 곳에서 딱 1년만 경험 삼아서 버티자라고 생각하며 시작했던 것 같다.
복수전공으로 다른 공부와 함께 시작했던 미대 생활이었는데, 다른 공부는 내 인생에서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서..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지금까지 미술만 공부하게 되었다.
호주 대학에서의 첫날 실기 수업에 들어갔을 때, 낯선 얼굴들에 주눅이 들어서 구석에 앉아있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서 처음으로 말을 걸어줬다.
"너 한국 사람이니?" 유독 경쾌한 목소리의 백인 중년 남성.
아, 이 분이 내 교수님이시구나.. 를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네, 전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에요."라며 덜덜 떠는 영어로 대답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갑구나! 나에게는 빛나라는 한국인 친구가 있단다. 그 외에도 여럿이 있지."
교수님께 한국인 친구들이 있다고??? 의아했다. 그 말을 하고는 그는 본인의 자리로 가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게 글렌과의 첫 만남이었다. 글렌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반가워! 나는 호주의 아티스트이자 글을 쓰는 작가, 그리고 아내 전용의 정원사가 주 직업인 글렌 바클리라고 한단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 어디에서든 본인을 정원사로 꼭 소개한다. 저건 진심인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글렌은 실제로 호주의 전문 직업학교에서 정원 일 자격증까지 땄었음. 글렌은 정원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정원에서 일할 때에 즐겁다고 한다. 또한, 정원은 그의 작품에 있어서 영감의 원천이다.)
첫날 수업은.. 글렌과 글렌의 보좌하던 젊은 보조 선생이 앞으로의 수업 과정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짧게 소개했다. 그리고 글렌은 말했다. "뭐든, 너네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렴. 나는 지켜볼 것이란다."
첫날에 그가 보여준 그에 대한 비디오 영상으로 우리 모두는... 마지막 장면에 깔깔깔 웃으며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리고 당시 그는 인스타그램에 푹 빠져있었는데,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급하고 중요하게 할 말 있으면 인스타그램으로 메시지를 보내렴. 나는 학교 메일은 아주 가끔 확인한단다."
글렌은 항상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본인의 작품과 일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글렌이 어느 날 나를 불러서 한국 명인의 도자기 작업용 칼을 사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글렌이 문득 "이번에 너 에세이 써야 하지?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누구니?"라고 물어봤다. 아는 몇몇 작가들의 이름을 대었고.. 글렌은 인스타그램으로 바쁘게 작가들을 팔로우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게 "이수경 작가에 대해서 써보는 게 어때? 내 친구란다. 나는 서울에서 그녀와 함께 일했지" 부끄럽게도 나는 당시에는 이수경 작가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이수경 작가님의 작품들을 찾아보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심지어는 작가님께 글렌 바클리의 이름을 팔며 이메일까지 보내서.. (지금 생각하면 이수경 작가님을 귀찮게 해 드려서 너무나도 죄송.) 에세이를 완성시켰다. 영어가 아직도 서툴러서 발로 쓴 첫 에세이였지만.. 교수님께서는 문법이나 문장력보다는 에세이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기셔서 괜찮은 점수를 주셨던 것 같다.
어느 날, 글렌이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넌 좀 미쳐야 해. You need to be crazy."
그날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일단 미치기로 했다.
언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른 학생들보다 작품 만드는 것이라도 미친 듯이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항상 제일 마지막까지 스튜디오에 남았던 것은 나였고, 글렌은 그런 내 모습을 높이 평가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최종 성적으로는 HD라는 가장 좋은 등급의 점수를 받았다. 한국에서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그 점수받고.. 너무 감격해서 하루 종일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점수를 받고나서부터 공부에 자신감이 붙었고.. 성취감이 뭔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글렌의 조언대로 나 역시 도자기 작업을 하고 있으며, 여전히 내 길을 찾아가며 공부하는 중. 그리고 글렌이 내게 주었던 그 용기와 희망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언젠가 되돌려주고 싶어서 노력하며 살아간다. 글렌은 내가 분명 재능이 있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었으며, 그 믿음은 내 인생에서 기적이 되어주었다.
학교에도 슬슬 적응되어갔을 때, 대략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문득 글렌 교수님께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교수님, 근데, 한국 친구들은 어떻게 만났어요? 여행으로 한국에 가셨었나요?"
글렌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 일하러 갔었지."
Tell Me Tell Me는 백남준이 시드니 비엔날레에서 한국 미술을 알리기 위해 다른 예술가들과 호주 시드니를 방문했던 1976년을 기점으로 2011년까지의 한국과 호주 현대 미술을 중심으로 한국과 호주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이다. 호주 현대 미술관(MCA)의 글렌 바클리와 한국의 국립 현대 미술관의 김인혜 큐레이터가 함께 한 콜라보레이션으로 30년 동안의 양국 미술의 변화를 탐구하는 전시회였다.
"왜 텔미텔미였어요?" 글렌 교수님께 물어봤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원더걸스."
아........ 그렇구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김인혜 큐레이터님과 글렌 바클리 교수님이 이 전시회를 준비하고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텔미텔미)를 하고 알아감으로써 교차점을 찾는 그 과정에서 나온 전시회 제목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전시회를 본 적도, 가본 적도 없지만..
글렌이 그동안 내게 보여준 마음들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이 전시회에 자부심을 느끼고..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조건적으로 모든 한국 학생들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나와 같은 과목을 공부했던 2명의 다른 한국 학생들은 성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외면받았었다.) 글렌은 한국에서의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항상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날, 글렌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큰 나무 주걱을 보여줬는데, 한국 물건이라며 한글 옆의 한자를 읽어달라고 부탁했었다.
한자 몇 개를 다 못 읽자 나는 가짜 한국인(Fake Korean)이 된 것 같았다.
글렌은 MCA의 큐레이터로서의 경험이 아티스트로서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평소에도 그는 학생들에게도 만약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면 항상 무언가를 보고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시각적 지식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배워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글렌은 작업할 때,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들으며 항상 흥얼거린다. 마치 그의 감정과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엄청나게 지루하고 단조롭지만 나는 여전히 그 과정을 사랑합니다.
글렌 바클리의 작품들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며 도자기의 역사, 그가 즐겨 듣는 대중가요들, 정원과 예술에서 나오는 영감들과 주변인들과의 대화에 대한 이러한 관심 사이의 공간에서 작동한다. (여담으로 그는 젊어서 락그룹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글렌은 그가 보고 듣는 것들에 대한 예술을 만든다.
글렌의 작품들은 도자기의 모든 부분들이 정교하게 작업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을 관객들에게 많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그가 사랑하는 시나 노래들 혹은 정원에서의 영감과 섞여서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도자기 작품을 탄생시켰다.
글렌에게 단 한 번도 표시 낸 적이 없지만.. 나는 글렌의 작품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호주 예술계 내에서 종종 글렌의 특이한 작품들에 대해 논란이 있다는 것은 매우 잘 알고 있지만 개인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에 정해진 답이 어디에 있나.
나는 그의 작품들에 대한 진실성을 보았고 앞으로도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팬으로서 지켜보고 싶다.
항상 까불까불, 글렌에게 전혀 관심 없는 척하는 제자이지만.. 사실 내가 그의 제자라는 것에 엄청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아마 그는 절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의 작품들을 소장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