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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문지기

by 돌부처

지맥 포식자와의 사투가 있은 지 사흘이 지났다.


겉으로 보기에 서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북아현동 재개발 공사장은 '지반 침하 우려 및 유물 발견 가능성'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무기한 폐쇄되었고, 언론은 이를 건설사의 부실 공사와 조합의 비리 탓으로 돌리며 연일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시민들은 혀를 차며 뉴스를 소비했지만, 그 누구도 그 땅 깊은 곳에서 벌어진 진짜 전투, 괴물의 처절한 비명과 푸른 불꽃의 정화 의식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오직 그날 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생사를 넘나들었던 세 사람만이 그 진실을 무겁게 공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진은 윤도진이 비밀리에 마련해 준 새로운 안전가옥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전의 빛도 들지 않던 허름한 지하 창고가 아닌, 도심 한복판 광화문 사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적의 눈을 완벽하게 피하려면 오히려 가장 번화하고, 수많은 CCTV와 시선이 교차하는 곳에 숨어야 한다'는 윤도진의 지론 때문이었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발아래로는 쉴 새 없이 흐르는 차량의 붉고 흰 불빛들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하진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지키려 하는 이 도시의 거대함과 그 속에 숨겨진 위태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윤도진이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내밀며 물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형사가 아닌, 하진의 보호자이자 매니저, 그리고 가장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괜찮아요. 문지기님의 힘이... 점점 더 제 몸에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예전처럼 힘을 조금만 써도 쓰러지거나 코피를 쏟지는 않아요. 마치 제 원래 힘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졌어요."


하진은 찻잔을 받아 들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며칠간의 휴식과 가문에서 보내온 약재 덕분에 그녀의 안색은 한결 좋아 보였다. 푸른 옥 조각은 이제 단순한 돌이 아니라 그녀의 일부처럼 목에 걸려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심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을 딛고 일어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한 강인함이었다.


"다행이군. 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백면 그놈, 이번 일로 잔뜩 독이 올랐을 테니까."


"알아요. 저도 느껴져요. 도시의 기운이... 마치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지만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어요."


하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그 사람... 이강우 씨는요? 아직 연락 없나요?"


"아직 없습니다. 그 명함에 적힌 번호로 몇 번이나 연락해 봤지만, 신호만 가고 받지 않더군요. 제멋대로인 놈이에요. 어쩌면 돈만 챙기고 잠적했을지도 모르죠."


윤도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형사의 입장에서, 이강우 같은 무법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하진은 알고 있었다. 윤도진 역시 이강우의 압도적인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이강우의 날카로운 칼날과 미친듯한 속도가 없었다면, 그들은 지맥 포식자의 뱃속에서 소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사람이 필요해요, 형사님. 백면의 세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뿌리가 깊어요. 지하 깊은 곳, 법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까지 뻗어있죠. 그런 곳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정보를 캐내고, 때로는 더러운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뒷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윤도진은 한숨을 내쉬며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았다. '대외비' 도장이 찍힌 서류들이었다.


"이강우. 34세. 전직 특수부대, 그것도 최정예라는 HID 출신. 군 복무 시절 대북 작전 중 실종되었다가 1년 만에 기적적으로 귀환했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작전 중에 귀신을 봤다거나, 설명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쓴다거나 하는. 정신 감정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고 불명예 제대했더군요."


윤도진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제대 후에는 한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최근 몇 년 사이 암흑가에서 '해결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어요. 주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기괴한 의뢰들, 예를 들면 저주받은 물건을 회수하거나, 귀신 들린 건물을 청소하는 일 같은 걸 처리하면서. 돈만 주면 악마와도 거래한다는 소문이 돌 만큼, 위험하고 타락한 놈입니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네요."


하진은 서류 속, 군복을 입은 젊은 시절 이강우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그의 눈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맑았지만, 동시에 깊은 공허함을 담고 있었다. 그 1년의 실종 기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위험한 놈입니다. 통제가 안 될 거예요.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확실한 '대가'가 필요할 겁니다. 돈이나 협박 따위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대가는... 이미 준비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거절할 수 없는 걸로요."


하진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자신의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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