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것은 지각 변동으로 인한 단순한 지진이나 기계적인 진동이 아니라, 억지로 살갗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호소하는 거대한 생명체의 처절한 비명이었다.
하진은 발바닥을 통해 척추까지 전해지는 그 끔찍한 고통의 파동에 잠시 휘청거렸다. 문지기의 힘을 각성한 이후, 그녀의 감각은 서울이라는 도시 전체의 신경망과 연결된 듯 예민해져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서울이 느끼는 고통은 마치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생생했다.
“젠장, 또 시작이군. 아주 제집 안방인 줄 알아.”
자칭 도깨비 사냥꾼, 이강우가 혀를 차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는 구덩이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칠흑 같은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무당 아가씨. 그리고 형사 양반. 여기서 멍하니 달 구경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아니지? 저 밑에 있는 놈이 밥상 다 차리고 이제 막 숟가락 들기 직전이라고. 빨리 도망쳐. 늦으면 국물도 없어.”
“저 밑에... 대체 뭐가 있는 겁니까?”
윤도진이 총구를 내리지 않은 채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괴물의 팔을 자르고,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 수상한 남자를 아직 신뢰할 수 없었다. 그의 직감은 이 남자가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뭐긴 뭐야. 백면이 공들여 키우는 애완동물이지. 이 동네 재개발 공사가 왜 멈췄는지 알아? 조합원들끼리 이권 다툼하다가 멈췄을 것 같아? 웃기지 말라고 해. 진짜 이유는 땅을 팔 때마다 인부들이 미쳐서 동료를 곡괭이로 찍어 죽이거나, 원인 모를 병에 걸려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갔기 때문이지. 백면 그 자식이 여기다 알을 까놨거든.”
이강우는 허리춤에서 강력한 군용 손전등을 꺼내 구덩이 아래를 비추었다. 빛줄기가 닿는 곳마다 끈적하고 검붉은 점액질이 동굴 벽면을 흉물스럽게 뒤덮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생물의 내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혐오스럽고 불길한 풍경이었다.
“‘지맥(地脈) 포식자’. 이 땅에 흐르는 기운을 빨아먹고 자라는 놈이야. 놈이 다 자라서 성체가 되면, 이 일대 지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릴 거야. 싱크홀? 그런 귀여운 수준이 아니라고. 서울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서, 빌딩 몇 개는 우습게 삼켜버릴 거다.”
그의 설명에 하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백면은 단순히 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을 넘어, 도시의 물리적인 기반 자체를 무너뜨려 거대한 재앙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악의가 아닌, 멸망을 향한 계획이었다.
“내려가야 해요. 지금 당장.”
하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미쳤어? 맨몸으로 저길 들어가겠다고?”
이강우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착각하나 본데, 저기는 귀신들 소굴이 아니라 괴물 뱃속이야. 부적 몇 장 태우고 방울 흔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들어가면 뼈도 못 추려.”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내려갈 거잖아요.”
하진은 그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날카로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강우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녀의 눈빛에서 예상치 못한 강단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받았으니까. 의뢰인이 저놈 모가지를 원하거든. 선입금 받은 건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내 철칙이라서.”
“누구한테요? 누가 그런 의뢰를 하죠?”
“그건 영업 비밀이지. 알면 다쳐. 아무튼, 나는 갈 거니까 말리지 마. 대신 내 발목 잡으면 가만 안 둬.”
그는 굴착기의 붐대에 매달려 있는 굵은 밧줄을 잡고, 망설임 없이 훌쩍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같이 가요.”
하진이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 혼자서는 안 되지만, 당신 힘만으로도 부족할 거예요. 저 밑에 있는 건... 단순한 괴물이 아니니까. 당신이 가진 그 칼만으로는 죽일 수 없어요.”
그녀는 구덩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읽었다. 그것은 단순한 괴수가 아니었다. 수많은 원혼들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증오와 원망, 그리고 굶주림의 결정체였다. 영적인 핵을 파괴하지 않는 한, 물리적인 타격만으로는 끊임없이 재생하며 덤벼들 것이다.
이강우는 잠시 하진과 윤도진을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죽어도 원망하지 마. 대신 저놈 잡아서 나오는 건 내 몫이야. 그건 건드리지 않는 조건이야.”
세 사람은 밧줄을 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공기는 덥고 습해졌고, 비릿한 피 냄새와 썩은 고기 냄새가 진동해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지하 20미터, 아니 그보다 더 깊이 내려갔을까.
굴착기가 인위적으로 파놓은 굴은 끝나고, 자연적으로 생긴, 혹은 괴물이 뚫어놓은 거대한 지하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의 벽면은 마치 거대한 뱀이 지나간 자국처럼 매끄럽고 축축했다.
동굴 내부는 지옥도 그 자체였다. 천장과 벽에는 오래된 사람의 뼈와 짐승의 사체들이 거미줄 같은 점액질에 엉겨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검은 오물이 발목까지 차올라 걸을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동굴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둥지 같은 공간에서, 끔찍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꾸르륵... 쩝쩝.... 우적우적....
무언가를 탐욕스럽게 씹어 먹는 소리.
윤도진이 손전등을 그쪽으로 비췄다. 빛줄기가 어둠을 가르며 거대한 형체를 드러냈다.
“헉....”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평생 끔찍한 시체를 봐온 그였지만, 눈앞의 존재는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에는 집채만한 거머리처럼 생긴 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놈의 몸통은 반투명해서, 안에서 소화되고 있는 붉은 덩어리들과 꿈틀거리는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놈은 흙벽에 붙어 있는 굵은 나무뿌리 같은 것을 입에 물고 빨아먹고 있었는데, 그 뿌리에서는 붉은색이 아닌 황금빛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건....”
하진이 경악하며 입을 막았다.
“지맥이에요. 서울의 기운이 흐르는 혈관... 놈이 그걸 빨아먹고 있어요. 땅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고요!”
괴물은 빛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놈의 얼굴에는 눈코입 대신, 수많은 촉수들이 말미잘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방해꾼... 냄새나는 쥐새끼들이... 기어들어 왔구나....]
괴물의 몸에서 텔레파시 같은 강력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악의 그 자체였다.
[백면 님이... 너희를 기다리라 하셨다.... 내 먹이로....]
놈은 이미 그들의 방문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강우의 의뢰도, 이곳의 이상 징후도 모두 그들을 유인하기 위한 백면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젠장, 역시 낌새가 더럽더라니! 백면 이 개자식, 나까지 낚았어?”
이강우가 단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빨랐다.
“야! 형사 양반, 무당 아가씨!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엄호해! 죽고 싶은건 아니지?”
그는 놀라운 속도로 괴물의 촉수를 피하며 놈의 비대해진 옆구리를 깊게 베었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괴물은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상처 부위에서 더 많은 촉수를 뿜어내며 이강우를 휘감으려 했다. 놈의 재생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물리 공격이 안 통해요! 단순히 베는 걸로는 소용없어요! 놈의 핵을 찾아야 해요!”
하진이 소리쳤다. 그녀는 옥 조각을 쥐고 영적인 시야를 열었다. 괴물의 몸속, 수많은 원혼들이 고통스럽게 뒤엉킨 중심부에, 붉게 빛나는 작은 구슬 같은 것이 보였다. 백면의 기운이 응축된 마석(魔石)이었다.
“가슴! 가슴 한가운데에 붉게 빛나는 핵이 있어요! 거기가 급소예요!”
“형사 양반! 들었지? 내가 시선을 끌 테니까, 저기다 납탄 좀 박아줘! 실수하면 내 머리통 날아가니까 똑바로 쏴!”
이강우가 소리치며 괴물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단검을 괴물의 등에 깊숙이 꽂아 넣고 매달려, 놈의 눈을 가리고 주의를 끌었다. 괴물이 고통과 분노에 몸부림치며 촉수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동굴 벽이 부서지고 돌들이 떨어져 내렸다.
윤도진은 침착하게 조준했다. 흔들리는 괴물, 어두운 조명, 쏟아지는 낙석, 긴박한 상황. 하지만 그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괴물의 가슴 한가운데가 노출되는 찰나의 순간을 기다렸다.
탕!
총성이 동굴을 울렸다. 총알은 정확하게 괴물의 가슴 한가운데, 붉은 핵이 있는 곳을 관통했다.
[키에에에에에엑!]
괴물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놈의 가슴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며 발광했다. 촉수들이 사방으로 튀며 이강우를 내동댕이쳤다.
“으윽!”
이강우가 벽에 부딪혀 바닥에 굴렀다. 하지만 괴물은 죽지 않았다. 총알구멍 주변으로 살이 다시 차오르며 상처를 회복하고 있었다. 핵은 파괴되었지만, 백면의 기운이 남아있는 한 놈은 불사신이었다.
“안 돼... 정화해야 해! 기운을 끊어내야 해요!”
하진이 나섰다. 그녀는 괴물을 향해 달렸다. 발목을 잡는 점액질 때문에 넘어질 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서하진 씨! 위험해! 돌아와요!”
윤도진이 소리쳤지만, 하진은 이미 괴물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괴물이 그녀를 발견하고 거대한 입을 벌려, 그녀를 통째로 삼키려 했다. 썩은 내와 죽음의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그 순간, 하진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녀의 손에는 푸른 빛을 맹렬하게 내뿜는 옥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문지기의 힘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사라져라, 부정한 것아! 이 땅에서 떠나라!”
그녀는 옥 조각을 쥔 주먹으로, 총알구멍이 뚫려 아직 아물지 않은 괴물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푸른 불꽃이 괴물의 몸속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불꽃은 괴물의 핵을 감싸고 있던 백면의 사악한 기운을 태워버리고, 억울하게 묶여 있던 수천의 원혼들을 해방시켰다.
[안 돼...! 싫어...! 백면 님... 살려줘...!]
괴물의 몸이 안에서부터 빛을 내뿜으며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검은 점액질이 사방으로 튀었다. 놈은 마지막 발악으로 남은 촉수를 휘둘러 하진을 쳐냈다.
“악!”
하진은 거대한 힘에 밀려 벽에 부딪혔다. 숨이 턱 막히고 갈비뼈가 울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녀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괴물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놈의 거대한 몸은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렸고, 그 위로 수백 개의 하얀 빛들이 반딧불처럼 피어올라 천장으로 사라졌다. 해방된 원혼들이었다. 동굴 안을 가득 채웠던 악취가 사라지고, 맑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동굴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아... 하아....”
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진흙과 오물투성이였고, 여기저기 멍이 들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윤도진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네... 덕분에요.”
이강우는 무너진 괴물의 시체 더미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검은 점액질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붉게 빛나는 작은 보석 같은 결정체였다. 괴물의 핵의 파편이었다.
“쳇, 건질 게 이거 하나뿐이네. 고생한 거에 비하면 수지타산이 안 맞는데.”
그는 투덜거리며 그것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하진을 보며 조금 달라져 있었다. 처음의 경멸이나 무시는 사라지고, 인정과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제법인데? 그냥 곱게 자란 무당인 줄 알았더니, 깡도 있고 싸움 솜씨도 꽤 쓸만하잖아. 특히 그 불꽃, 마음에 들었어.”
“칭찬으로 듣죠.”
하진이 힘없이 웃었다.
세 사람은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새벽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요?”
윤도진이 이강우에게 물었다.
“글쎄. 의뢰는 뭐, 반쯤은 성공했으니까. 그리고 꽤 재미있는 걸 봤으니까 당분간은 이 근처에서 얼쩡거려 볼까 해. 백면 잡는 거, 나도 관심 있거든. 그 자식한테 빚진 것도 있고.”
이강우는 씨익 웃으며 구겨진 명함 한 장을 윤도진에게 던졌다.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 공짜는 아니지만, 아가씨 봐서 지인 할인 정도는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더 큰 건수여야 해.”
그는 손을 흔들며 어둠이 남아있는 골목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상한 놈이군요. 위험해 보입니다.”
윤도진이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명함에는 아무런 직함도 없이, 전화번호 하나와 ‘해결사’라는 세 글자만 투박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강한 사람이에요. 백면을 상대하려면, 저런 사람의 힘도, 어둠의 방식도 필요할지 몰라요.”
하진은 이강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면은 이제 시작이에요. 저 괴물은, 서울 곳곳에 심어놓은 수많은 씨앗 중 하나일 뿐이에요. 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숙이, 이 도시에 뿌리내리고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서울의 새벽하늘 아래, 수많은 불빛들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 하나하나 아래, 어떤 욕망과 괴물이 자라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백면의 거미줄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촘촘했다.
하지만 이제 하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곁에는 든든한 방패인 윤도진이 있었고, 어둠 속 어딘가에는 예측할 수 없는 날카로운 칼날, 이강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안에는 문지기의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전쟁은, 이제 막 그 서막을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