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춤추고, 욕망에 들뜬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는 화려한 빛의 얼굴. 다른 하나는 그 빛이 닿지 않는 골목 구석구석, 낡은 빌딩의 그림자 속에 웅크린 채 썩은 내를 풍기는 어둠의 얼굴.
서하진은 이제 그 두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강남의 한 고층 빌딩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흩어놓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도시의 심장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한 달. 그녀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윤도진 형사와 ‘피의 계약’을 맺은 지 딱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은 겉보기에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행운부적챌린지’는 철없는 유행으로 치부되어 잊혔고, 한재준은 희대의 사기꾼으로 낙인찍혀 감옥에 갇혔다.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다시 욕망을 좇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하진의 눈에는 보였다.
도시를 휘감고 흐르는 기운이 미묘하게 뒤틀려 있다는 것을.
백면도깨비가 사라지기 전 뿌려놓은 악의 씨앗들이, 사람들의 무관심과 탐욕을 양분 삼아 아스팔트 아래서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전에는 거대하고 하나의 뚜렷한 악이 존재했다면, 지금은 잘게 쪼개진 수천 개의 작은 악들이 도시 전체로 스며들어, 마치 만성적인 질병처럼 서울을 앓게 하고 있었다.
“위험합니다. 내려오시죠.”
등 뒤에서 들려온 낮고 굵은 목소리에, 하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윤도진이었다. 그는 옥상 철문을 열고 들어와,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난간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하진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발끝을 불안하게 쫓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 자신 사이에 연결된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그의 등장과 함께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을.
“그냥... 좀 보고 있었어요.”
하진은 난간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오늘따라 기운이 유독 탁하네요. 마치 비가 오기 전처럼.”
“실제로 비 예보가 있습니다. 밤부터 폭우가 쏟아진답니다.”
윤도진은 코트 깃을 세우며 그녀에게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따뜻했다. 그 온기가 하진의 차가운 손바닥을 녹였다.
“몸은 좀 어때요? 아직 무리하면 안 되는데.”
“괜찮아요. 문지기님의 힘이... 이제는 제 몸에 꽤 익숙해졌거든요.”
하진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곳에는 푸른 옥 조각이 목걸이가 되어 걸려 있었다. 심장 박동에 맞춰 옥 조각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그녀의 전신으로 맑은 기운을 순환시키고 있었다. 한 달 전만 해도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해 피를 토했지만, 이제 그녀는 그 힘을 자신의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윤도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달 전,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알던 세상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음도. 그는 죽었다 살아났고, 그 대가로 평범한 인간들은 평생 느낄 수 없는 감각 하나를 얻었다. 바로 서하진이라는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감응이었다. 그녀가 위험에 처하거나 감정이 격해지면, 그의 심장도 이유 없이 뛰거나 조여들었다. 그것은 피로 맺은 계약의 증거였다.
“새로운 사건입니까?”
윤도진이 본론을 꺼냈다. 하진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시간에 그를 불러냈을 리 없었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의 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서대문구, 재개발 지구.”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서울의 구도심, 낡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였다. 밤이라 불빛이 드문드문했지만, 하진의 눈에는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검고 끈적한 연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며칠 전부터... 저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땅의 비명 같은 거요.”
“재개발 지구라... 철거민들과 용역 업체 간의 충돌이 잦은 곳이긴 해요. 최근에도 방화 사건이 몇 건 있었고.”
“아니요. 그런 물리적인 충돌이 아니에요. 무언가가... 땅을 파헤치고 있어요. 아주 깊은 곳까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리고 있는 느낌이에요.”
하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봐야겠어요. 백면의 조각 중 하나가, 그곳에 숨어든 것 같아요.”
서대문구 북아현동 재개발 3 구역.
이미 주민들이 대부분 떠나고, 흉물스럽게 뼈대만 남은 건물들과 깨진 유리창들만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는 유령 도시였다. 곳곳에 붉은 스프레이로 ‘철거’, ‘X’ 표시가 그려져 있었고, 찢어진 현수막들이 바람에 날려 기괴한 소리를 냈다.
윤도진의 차가 가파른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쓰레기 태우는 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섞인 비릿한 쇠 냄새.
“이쪽이에요.”
하진은 망설임 없이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윤도진은 손전등을 비추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의 손은 언제든 총을 뽑을 수 있도록 외투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버려진 가구들과 쓰레기 더미가 길을 막고 있었고, 발밑에서는 쥐들이 찍찍거리며 도망갔다. 하지만 하진은 마치 익숙한 길을 걷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녀의 눈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영적인 잔재들이 그녀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골목 끝에 펜스로 둘러싸인 공터가 나타났다. 이미 철거가 완료되어 터만 남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공터 한가운데, 뜬금없이 거대한 굴착기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출입 금지 테이프가 어지럽게 둘러쳐져 있었다.
“잠깐.”
윤도진이 하진을 멈춰 세웠다. 그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흙을 살폈다.
“최근에 중장비가 들어온 흔적이군요. 하지만... 이상합니다. 이 구역은 아직 철거 허가가 안 났을 텐데. 조합원들끼리 소송 중이라 공사가 중단된 곳인데.”
“그럼 저 굴착기는... 몰래 들어왔다는 거네요.”
하진은 굴착기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거대한 기계 덩어리는, 마치 잠들어 있는 괴수처럼 보였다. 그런데 굴착기의 삽 부분, 흙을 파내는 그 날카로운 톱니 부분에 무언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펜스 개구멍을 통해 공터 안으로 들어갔다. 윤도진도 뒤따랐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굴착기가 파놓은 구덩이는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거의 지하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일반적인 철거 현장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채굴하는 광산 같았다.
그리고 굴착기의 삽날.
그곳에는 흙과 함께, 검붉게 말라붙은 액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녹슨 쇳물 같기도 하고, 오래된 피 같기도 했다.
하진이 손을 뻗어 그 액체에 가까이 대자, 손끝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 원혼이에요.”
하진이 낮게 속삭였다.
“이 땅에 묻혀 있던, 아주 오래된 지박령들의 피에요. 누군가... 이 땅의 지맥을 강제로 끊어버렸어요.”
그녀는 구덩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갑고 습한 바람이 불어 올라왔다. 그 바람 속에는 수백, 수천 명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건 공사가 아니에요. 도굴... 아니, 사냥이에요. 땅의 기운을 사냥하고 있어요.”
그때였다.
우우웅.
구덩이 깊은 곳에서, 기계음인지 짐승의 울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진동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물러서요!”
윤도진이 하진을 잡아채 뒤로 물러났다.
구덩이 속에서 무언가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철커덕, 철커덕’ 하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달빛을 받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온몸이 흙과 녹슨 고철들로 뒤덮여 있었다. 철근이 뼈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시멘트 덩어리가 근육처럼 뭉쳐 있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깨진 콘크리트 조각이 가면처럼 붙어 있었는데, 그 조각 위에는 누군가 붉은 페인트로 거칠게 그려놓은 ‘웃는 입’ 모양이 있었다.
백면의 표식이었다.
[배고파....]
괴물이 입을 열자, 쇳소리 섞인 끔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땅이... 피를 원해....]
“저게 대체 뭡니까.”
윤도진이 총을 겨누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토귀’... 아니, 저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하진은 옥 조각을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죽은 원혼들과, 버려진 건축 자재들에 백면의 기운을 불어넣어 만든... 합성 마수(魔獸)예요. 땅의 기운을 오염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파수꾼 같아요.”
괴물이 두 사람을 발견했다. 콘크리트 가면 아래, 텅 빈 눈구멍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산 사람... 신선한 피....]
괴물이 기괴한 속도로 달려들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빨랐다. 윤도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총알이 괴물의 가슴팍에 박혔다. 시멘트 조각이 튀었지만, 괴물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괴물이 휘두른 철근 팔이 윤도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윤도진은 몸을 숙여 간신히 피했다. 철근이 허공을 가르며 윙 소리를 냈다. 그가 구르며 다시 자세를 잡는 사이, 괴물은 방향을 틀어 하진을 향해 돌진했다.
“서하진 씨!”
하진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자리에 서서,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문지기의 이름으로 명한다.”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가슴의 옥 조각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부정한 흙과 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그녀의 손바닥에서 푸른 불꽃이 터져 나와 괴물을 향해 쏘아졌다. 불꽃은 괴물의 몸에 닿는 순간, 그물처럼 퍼지며 괴물을 휘감았다.
[크아아아!]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푸른 불꽃은 괴물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이루고 있는 ‘결합’을 해체하고 있었다. 백면의 사악한 접착제가 녹아내리자, 억지로 붙어 있던 고철과 흙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괴물은 몸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남은 한 팔을 뻗어 하진의 목을 조르려 했다. 그 손끝에는 날카로운 못들이 박혀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괴물의 팔이 허공에서 잘려 나갔다.
“누구냐!”
윤도진이 소리쳤다.
괴물의 잘린 팔이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괴물 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낡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기다란 검집을 메고 있었다. 손에는 방금 괴물의 팔을 자른, 검은색 날을 가진 묵직한 단검이 들려 있었다. 나이는 윤도진과 비슷해 보였지만, 눈매가 훨씬 더 날카롭고 야수 같았다.
남자는 잘려 나간 팔을 툭 차며, 하진과 윤도진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런, 이런. 서울 바닥에 쥐새끼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제법 똘똘한 무당 아가씨가 있었네?”
그는 하진의 가슴에 걸린 옥 조각을 유심히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문지기의 옥? 이거 꽤 비싼 물건인데. 서 씨 가문이 다시 문을 열었다더니, 헛소문은 아니었나 보군.”
“당신 누구야.”
윤도진이 총구를 남자에게 돌렸다. 이 남자는 적일까, 아군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백면의 것과는 다르지만, 결코 깨끗하거나 선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피와 살육에 익숙한, 사냥꾼의 냄새가 났다.
남자는 윤도진의 총구를 보고도 킬킬거렸다.
“워워, 형사 나리. 총구 좀 치우지? 나는 적어도 저런 흙덩어리 괴물 편은 아니니까.”
그는 단검을 능숙하게 돌려 검집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이강우. 사람들은 나를 ‘도깨비 사냥꾼’이라고 부르지. 뭐, 돈만 주면 귀신이든 도깨비든 다 잡아주거든.”
그는 하진을 향해 윙크를 했다.
“아가씨. 저런 잡것들은 정화니 뭐니 고상하게 대할 필요 없어. 그냥 썰어버리는 게 제일 빨라. 근데....”
이강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는 구덩이 깊은 곳을 가리켰다.
“저 밑에 있는 건, 나나 아가씨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데? 이번엔 꽤 큰 판의 냄새가 나.”
그의 말대로였다. 괴물이 부서진 자리, 구덩이 깊은 곳에서부터,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하고 불길한 진동이 올라오고 있었다. 땅 자체가 울부짖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도굴이 아니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혈관에, 누군가 독극물을 주입하고 있었다.
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상관없어요.”
하진이 이강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막아야 한다면, 막을 뿐이에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불꽃이 다시 한번 맹렬하게 타올랐다.
도시의 밤,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전쟁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