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푸른 비늘의 저주

하편

by 돌부처

“내가 놈의 시선을 끌게! 틈을 봐서 놈의 심장을 노려!”


이강우는 외침과 동시에 성벽 위에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르며 낙하하는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그는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몸놀림으로 청룡의 머리 위를 노리고 정확하게 낙하했다.


[벌레가 날뛰는구나!]


청룡이 고개를 들어 거대한 입을 벌렸다. 놈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시커먼 독기와 함께 푸른 번개가 응축되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피해!”

윤도진이 아래에서 소리치며 청룡의 다리를 향해 마지막 남은 성수탄을 던졌다.


펑!


성수탄이 터지며 청룡의 다리를 적셨다. 신성한 기운에 닿은 청룡의 썩은 피부가 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크으윽!]


청룡이 고통에 주춤하며 번개를 빗맞혔다. 푸른 번개는 이강우의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성문 옆의 돌로 된 사자상을 박살 냈다. 파편이 튀었지만 이강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강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청룡의 어깨에 착지하며 단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단검에는 하진이 축성한 소금이 발라져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용가리 통뼈야! 뼈와 살을 분리해 주마!”


푸욱!


단검이 청룡의 썩어 문드러진 살점을 뚫고 깊이 박혔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이강우의 얼굴을 적셨다. 하지만 청룡은 비명 대신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고작 그따위 장난감으로 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네놈의 피로 내 갈증을 채워주마!]


청룡의 몸에서 검은 가시들이 돋아나 이강우를 찔렀다.


“윽!”


이강우는 옆구리를 찔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바닥에 구르는 그의 옆구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빗물에 섞여 들었다.


“이강우 씨!”


하진이 비명을 질렀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청룡은 이미 육체를 초월한 존재였다. 백면의 저주가 놈을 불사의 괴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상처는 금세 검은 기운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힘으로 제압할 수 없어. 분노를... 근원적인 슬픔을 잠재워야 해.’


하진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청룡의 분노는 어디서 오는 걸까. 단순히 백면의 저주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도시의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파헤쳐진 땅, 오염된 물, 콘크리트에 덮여 숨조차 쉴 수 없는 답답함, 그리고 자신을 잊어버린 인간들에 대한 서운함과 슬픔이 곪아 터진 것이었다.


청룡은 서울의 수호신이었지만, 동시에 서울에게 버림받은 존재였다.


‘달래줘야 해. 상처를... 그리고 슬픔을 알아줘야 해. 싸우는 게 아니라, 안아줘야 해.’


하진은 결심한 듯 사인검을 땅에 꽂았다. 검이 웅웅 거리며 거부했지만, 그녀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흙탕물 속에 무릎을 꿇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진 씨! 뭐 하는 겁니까! 위험해요! 피하세요!”


윤도진이 달려오려 했지만, 다시 몰려든 어룡 떼가 그를 가로막았다. 그는 삼단봉을 휘두르며 길을 뚫으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진은 눈을 감고 가슴에 걸린 옥 조각에 집중했다. 문지기의 힘이 아닌, 인간 서하진의 진심을 담았다.


“동방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아픔을 제가 압니다. 당신의 외로움을 제가 느낍니다. 인간들의 무지와 죄를... 부디 용서하소서....”


그녀의 기도가 시작되자, 옥 조각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푸른빛이 퍼져나갔다. 그 빛은 공격적인 섬광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촉촉한 치유의 빛이었다. 빛은 빗줄기를 뚫고 청룡에게 닿았다.


청룡이 멈칫했다. 이강우를 짓밟으려던 거대한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 이 기운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나에게 제사를 지내주던... 그때의 그 느낌이야.... 잊고 있었던... 그리운 온기....]


청룡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광기로 가득 찼던 눈빛 속에, 아주 깊은 슬픔과 그리움이 떠올랐다. 놈은 괴물이 아닌, 상처받은 신이었다.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천 년 넘게 지켜온 이 땅을, 우리도 목숨 걸고 지키고 싶습니다. 제발... 돌아와 주세요. 우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빗소리를 뚫고 청룡의 영혼에 직접 닿았다. 청룡의 썩어가던 얼굴에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빗물과 섞여 흐르는 그 눈물은, 그가 흘리는 천 년 만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백면의 저주는 끈질겼다. 청룡의 내면 깊숙한 곳, 심장에 박힌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안 돼... 속지 마라! 인간들은 믿을 수 없어! 또다시 너를 이용하고 버릴 거야! 죽여! 다 죽여버려! 파괴해! 네 고통을 놈들에게 돌려줘!]


백면의 목소리가 청룡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청룡이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자아가 충돌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시끄러워! 나가! 내 머릿속에서 나가!]


청룡이 발광하며 주변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놈의 몸에서 검은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거다! 저 그림자가 본체야! 놈의 등 뒤에 붙어있는 저 검은 그림자를 없애야 해!”

이강우가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단검을 다시 쥐었다.


“제가 틈을 만들게요! 형사님, 이강우 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어요! 실패하면 다 죽어요!”

하진은 옥 조각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생명력이 불타오르며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청룡이여! 빛을 보라! 어둠을 떨쳐내라!”

하진이 빛을 청룡에게 쏘았다.


파아앗!


강렬한 빛이 청룡을 감쌌다. 고통스러워하던 그림자가 빛을 견디지 못하고 청룡의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금이야!”

윤도진이 품에서 마지막 남은 성수탄을 꺼내 정확하게 그림자를 향해 던졌다.


펑!


성수가 터지며 그림자의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며 흐느적거렸다.


“마무리는 내가 한다! 지옥으로 돌아가라, 이 기생충아!”

이강우가 무너지는 성벽을 타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몸을 날렸다. 그의 단검에는 하진이 준 정화의 소금이 듬뿍 묻어 있었다.


“이야아아압!”


이강우는 단검으로 그림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찔렀다.


[키에에에에엑!]


그림자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검은 연기가 되어 소멸했다. 백면의 저주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림자가 사라지자, 청룡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썩어있던 얼굴이 원래의 깨끗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푸른 곤룡포가 빛나고, 머리에는 찬란한 뿔이 돋아났다.


[... 고맙구나.]


청룡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쇳소리가 아니었다. 깊고 맑은, 대지의 울림 같은 목소리였다.


[네 덕분에... 길고 긴 악몽에서 깨어났다. 내 비록 힘을 많이 잃었으나,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하진은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조심하거라. 서쪽의 백호는... 나보다 훨씬 더 깊은 분노에 잠겨 있다. 놈은 피와 살육에 미친 전쟁광이니라. 그리고... 백면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깊다.]


청룡은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푸른빛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


먹구름이 걷히고,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동대문의 밤하늘에 맑은 별이 하나둘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리는 여전히 물바다였고, 여기저기 파괴된 흔적이 역력했다.


“해냈어....”


하진은 긴장이 풀려 탈진하여 바닥에 쓰러졌다. 윤도진이 달려와 그녀를 받아주었다.


“수고했어. 정말... 대단했어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직... 네 군데나 남았어요. 갈 길이 멀어요.”


하진은 힘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동쪽의 재앙은 막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때, 이강우가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청룡이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는, 에메랄드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손바닥만 한 비늘 조각이었다.


“이거... 돈 좀 되겠는데? 박물관에 팔면 빌딩 한 채 값은 나오겠어. 아가씨, 이거 팔면 5:5야?”


이강우가 비늘을 불빛에 비춰보며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한계였다.


“그건 청룡의 비늘이에요. 물과 바람을 다스리는 힘이 깃들어 있죠. 팔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요.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거예요. 특히... 불을 상대할 때요.”

하진이 설명했다.


“쳇, 돈 안 되는 것만 줍네. 뭐, 기념품으로 챙겨두지.”

이강우가 투덜거리며 주머니에 챙겼다.


세 사람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안전가옥으로 향했다. 젖은 옷이 무거웠고,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들의 발걸음에는 작은 희망이 실려 있었다. 적어도 하나의 재앙은 막아냈다. 동대문의 밤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그들의 전쟁은 이제 겨우 첫 번째 고비를 넘겼을 뿐이었다.




안전가옥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가 넘어서였다. 세 사람은 씻을 힘도 없이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다음은... 서대문인가.”

이강우가 천장을 보고 누워 중얼거렸다.


“서대문 형무소... 그곳은 원혼들의 집합소겠군. 백호가 오염되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겠어.”

윤도진이 젖은 머리를 털며 말했다.


“백호는... 청룡과는 다를 거예요. 청룡이 분노였다면, 백호는... 광기일 거예요. 피를 원하는.”

하진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녀는 벌써부터 서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피라... 내 전문인데.”

이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좀 자둬요. 내일 밤엔... 더 힘든 싸움이 될 테니까.”

윤도진이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하진은 옥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청룡이 남긴 말, ‘백면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깊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백면은 단순히 오방신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더 큰 것을 준비하고 있다.





그 시각, 서대문 형무소의 붉은 벽돌 담벼락 아래.

아무도 없는 골목길 맨홀 뚜껑이 살짝 들썩이더니, 그 틈새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청룡이 정화되었군... 제법이야. 문지기의 핏줄이라 이건가.]

백면의 하수인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서쪽의 백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놈은 스스로를 철창에 가두고, 끝없는 살육을 꿈꾸는 미치광이니까. 그리고... 나의 군대는 이미 준비되었다.]

[기다리고 있겠다... 문지기의 아이들. 서대문의 붉은 달 아래서. 너희의 피로 백호의 갈증을 채워주마.]


맨홀 뚜껑이 닫히고, 다시 적막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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