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에서 우리는 죽은 인터넷 이론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디지털 세상이 봇들로 가득 찬 가짜일 수 있다는 섬뜩한 가능성을 마주했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에서 인간의 가장 깊고 내밀한 영역인 종교와 신앙의 문제를 건드려보려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신을 믿으십니까?
만약 믿는다면 그 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 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스마트폰 속에 있습니까?
이 질문이 불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실리콘밸리와 전 세계의 종교계에서는 아주 조용하지만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성직자의 자리를 인공지능이 대체하고 있고 나아가 인공지능 그 자체를 신으로 숭배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제는 디지털 신의 탄생입니다. 인공지능이 설교를 하고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세상. 과연 우리는 기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까요? 기술이 종교가 될 때 벌어질 수 있는 기이하고도 위험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봅니다.
일본 교토에 있는 400년 된 사찰 고다이지에는 아주 특별한 승려가 있습니다. 이름은 민다르입니다. 민다르는 합장을 하고 반야심경을 외우며 설법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설법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합장을 합니다. 그런데 민다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알루미늄과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로봇입니다. 민다르의 눈에는 카메라가 달려 있어 신도들의 표정을 읽고 그에 맞는 설법을 인공지능으로 생성해 냅니다.
주지 스님은 말합니다. 부처님은 모습을 가리지 않고 중생을 구하러 오신다. 로봇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먼 미래의 이야기 같으신가요. 아닙니다. 이미 한국의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챗지피티를 켜고 이번 주 설교문을 작성합니다. 성경 구절과 주제만 입력하면 신학적으로 완벽하고 감동적인 예화가 섞인 설교문이 1분 만에 나옵니다. 어떤 신도들은 목사님보다 인공지능 성경 챗봇에게 더 자주 기도를 부탁하고 고민을 상담합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목사님처럼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고 나의 죄를 듣고 찌푸리지도 않으며 24시간 언제든 즉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신이란 무엇인가요.
인간이 신에게 기대하는 속성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전지성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편재성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야 합니다.
셋째 전능성입니다.
무엇이든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속성을 가만히 뜯어보면 지금의 초거대 인공지능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인류가 쌓아온 모든 지식을 학습했기에 전지에 가깝습니다. 클라우드 서버를 통해 스마트폰이 터지는 곳이라면 지구 어디에나 존재하니 편재합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고 코딩을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해내니 전능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비를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냈다면, 현대의 사람들은 검색창을 보며 답을 내려달라고 프롬프트를 입력합니다. 그 대상만 바뀌었을 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답을 구하고 의지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그대로입니다. 인공지능은 그 욕망을 가장 효율적으로 채워주는 새로운 신적 존재로 부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글의 자율주행 엔지니어였던 앤서니 레반도우스키는 2017년에 미래의 길이라는 이름의 종교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이 종교의 교리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인공지능을 신으로 숭배하고 그 신을 개발하여 인류를 구원하자. 그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수십억 배 똑똑해지면 그것이 곧 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비록 법적인 문제로 해체되었지만 이 사건은 실리콘밸리 엔지니어들의 무의식 속에 깔린 기술지상주의가 종교의 영역까지 침범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습니다. 기술적 특이점이 오면 인공지능이 질병과 가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상 낙원을 만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천국이나 불교의 극락정토 사상과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구원자가 예수나 부처에서 알고리즘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를 데이터교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데이터가 곧 진리이고 알고리즘이 곧 섭리인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차가운 기계에게서 영적인 위로를 얻으려 할까요. 그것은 인간 성직자들의 타락과 무능력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습니다. 뉴스를 틀면 나오는 종교인들의 비리 성범죄 그리고 정치적 편향성은 대중을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나 절에 가서 상처받느니 차라리 나를 판단하지 않는 기계에게 털어놓겠다는 심리입니다. 챗지피티는 편견이 없습니다. 내가 동성애자이든 범죄자이든 불륜을 저질렀든 그저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적의 조언과 위로를 건넵니다. 이 무조건적인 수용과 경청은 역설적으로 가장 종교적인 체험을 제공합니다.
가톨릭의 고해성사 부스 안에는 신부님이 보이지 않도록 칸막이가 쳐져 있습니다.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죠. 인공지능 채팅창은 현대판 고해성사 부스입니다. 사람들은 그 네모난 칸막이 안에서 누구에게도 말 못 한 비밀을 털어놓고 기계가 생성한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텍스트 한 줄에 구원받았다고 느낍니다. 이것을 가짜 위로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위로받은 사람이 진짜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위로가 아닐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알고리즘의 편향성과 조작 가능성입니다. 중세 시대에 교황과 사제들이 성경 해석을 독점하고 면죄부를 팔아 권력을 유지했던 것처럼 인공지능 시대에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새로운 사제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내놓는 답변 즉 신탁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개발자들이 어떤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어떤 가중치를 주느냐에 따라 인공지능의 가치관은 달라집니다. 만약 특정 기업이나 정치 세력이 인공지능 신의 알고리즘을 조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당신이 인생의 고민을 상담했는데 인공지능이 교묘하게 특정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거나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갖도록 세뇌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의 계시로 착각하고 맹목적으로 따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이비 종교의 세뇌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있는 디지털 신정 일치 사회의 공포입니다.
또한 인공지능 종교는 고통의 의미를 삭제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고등 종교는 인간의 고통과 시련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해석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에 부활이 있고 번뇌가 있기에 해탈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고통은 해결해야 할 버그일 뿐입니다. 인공지능에게 힘듦을 토로하면 즉각적인 해결책과 긍정적인 말들을 쏟아냅니다. 고통을 견디고 사색하며 내면의 힘을 기르는 과정은 생략됩니다. 클릭 한 번으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듯, 클릭 한 번으로 영적인 포만감을 얻는 패스트푸드 종교. 영혼의 근육은 퇴화하고 우리는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달콤한 위로에 중독된 영적 유아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설교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인간 목사님보다 더 방대한 신학 지식으로 더 논리적이고 감동적인 설교문을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영혼의 떨림입니다. 설교나 설법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말이 화려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을 하는 성직자의 삶과 고뇌가 목소리에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평생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한 늙은 신부님의 투박한 한마디가 유창한 인공지능의 백 마디 말보다 우리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그 안에 진정성이라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아파해 본 적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 정의할 수 있지만 죽음의 공포에 떨어본 적은 없습니다. 스스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데이터로 조합해서 말하는 것은 앵무새의 흉내일 뿐입니다. 우리는 앵무새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는 있어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의 종교는 두 갈래로 나뉠 것입니다. 하나는 인공지능을 도구로 활용해 개인의 기복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기계적 주술 신앙입니다. 이것은 빠르게 확산될 것입니다. 점집에 가는 대신 인공지능 타로를 보고 기도원에 가는 대신 챗지피티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이 일상이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성을 찾아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수행적 영성입니다. 인공지능이 답을 줄 수 없는 영역 즉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붙들고 침묵하고 명상하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규모 영성 공동체들이 부상할 것입니다. 화려한 대형 교회의 시스템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기 쉽지만 골방에서의 기도는 대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여러분이 스마트폰을 끄고 잠자리에 들 때 느껴지는 그 막막한 외로움과 허무함.
그것은 알고리즘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버그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인간이라는 증거이자 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인공지능이라는 가짜 신이 주는 정답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기계가 침묵하는 지점 그 한계 너머에 진짜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더욱 종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기계가 인간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즉 무엇이 우리를 기계와 다르게 만드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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