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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강인성 Oct 22. 2023

그건 거기에 왜 있지?

있다는 건 무엇인가_존재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물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세요. 무엇이 있나요? 제 앞에 있는 걸 말해볼까요. 맥북, 맥북거치대, 키보드, 팜레스트, 매직패드, 시원한 물이 담긴 텀블러, 오래된 스피커, 중고로 산 턴테이블, 높게 자란 행운목, 갑 티슈, 가위, 엊그제 산 점퍼에 달렸던 택 등등.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쓴 게 이 정도입니다. 만약 마음먹고 쓰기 시작한다면 책 전체를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 채울 수도 있겠죠. 아무도 읽지 않을 거 기에 그런 책은 없겠지만요.

방금 저는 제 앞에 놓인 수백 가지의 사물들 중 11가지만 적어보았습니다. 알게 모르게 스스로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들로 적은 거죠. 만약 제가 책을 읽고 있었다면 다른 것들을 적었을 겁니다. 밥을 먹고 있었다면, 샤워를 하고 있었다면 또 달랐겠죠. 또한 방금 저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만 채운 책은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안 읽을 것이기 때문에요. 왜 저는 책상이 놓인 맥북은 언급했는데 코 푼 휴지는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왜 저는 취미철학은 쓰고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 채운 책은 쓰지 않는 걸까요. 제 앞에 맥북은 왜 있고 취미철학은 왜 책으로 나와야 할까요. 


맥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복습도 할 겸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응용하여 맥북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맥북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사물입니다. ‘현재’ ‘제 앞’에 있죠. 맥북은 속성을 지닙니다. 로즈골드 색의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검은색 키보드 자판과 그 아래엔 터치패드가 있군요. 네모난 형태에 모서리는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속성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속성이 달라져도 맥북은 맥북입니다. 

그러면 맥북을 맥북으로 만드는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게 아니면 맥북이 아니다 하는 거요. 많은 게 떠오르지만 이게 제일 강력해보는군요. ‘애플이 만듦’. 맥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사과로고이죠. 어느 기업에서 디자인부터 성능까지 맥북과 구분 불가능한 노트북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맥북이 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죠. 그건 맥북을 따라한 노트북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맥북을 삼 년째 잘 쓰고 있습니다. 오늘도 역시 스타벅스에 맥북을 들고 가 당당히 펼친 후 글을 쓰고 있죠. 그런데 문득, 갑자기 맥북의 바닥면이 보고 싶어 집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유심히 보기로 합니다. 그때 맥북의 바닥면에 적혀있는 아주 작은 글씨를 발견합니다. ‘메이드 바이 샤오미’ 그렇습니다. 애플의 정품인 줄 알았던 제 맥북이 샤오미에서 만든 카피제품이었던 거예요. (물론 맥북은 카피제품이 없습니다. 또한 예시로 든 샤오미 기업은 그러한 카피 제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예시로서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때 제가 할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첫째. 그 사실에 노발대발하며 맥북을 판 업체를 고소해 버리고 보상금으로 진짜 맥북을 사는 겁니다. 맥북으로서의 본질을 잃었으므로 맥북을 폐기시키는 거죠. 둘째. 조금 놀랍고 어이없긴 하지만 그냥 쓰는 겁니다. 애플에서 만든 게 아니면 어때요. 저는 만족하고 있었던걸요. 멀쩡히 잘 돌아가는 노트북을 애플에서 만든 게 아니라고 버리자니 좀 귀찮잖아요. 이 경우 맥북의 본질은 잃었지만 맥북은 파기되지 않습니다. 


문제 

우리가 맥북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맥북의 성능과 기능을 이용하고 싶어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그런 거 필요 없이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가지고 있죠. 맥북프로의 성능도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켜지지도 않는 구형 맥북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맥북을 폐기하는 이유도 가지각색입니다. 누군가는 정말 고장이 날 때까지 써서 어쩔 수 없이 폐기하고, 누군가는 멀쩡한대 단순히 질려서 새로운 노트북을 삽니다. 누군가는 애플이 싫어져서 바꾸어 버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생각보다 별로 안 쓰는 것 같아 그냥 팔아버리기도 하죠.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맥북의 본질이 맥북이 내 앞에 있는 이유와 무관해져요. 맥북이 맥북답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물이 자신의 본질을 잃어도 세계에 남아 있게 돼요. 이건 좀 이상합니다. 분명 본질은 어떠한 사물을 보편자로 묶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무언가입니다. 그런데 본질을 잃어도 그 사물이 사물로 남는다고요? 애플이 아니어도 맥북. 맥 os가 돌아가지 않아도 맥북. 켜지지 않아도 맥북이라고요?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첫 번째 해결책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있음의 기준을 인간에 두지 않는 겁니다. 맥북이 제 앞에 있습니다만 그건 제 기준이죠. 어느 날 제 앞의 맥북이 카피 제품인걸 알았어도 저는 맥북으로 쓸 겁니다. 하지만 그건 제 기준이에요. 맥북은 ‘애플에서 만듦’이라는 본질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무리 맥북이라 생각해도 그건 맥북이 아닌 겁니다. 저의 의견은 전혀 중요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누군가 맥북이 질려서 버렸다고 칩시다. 하지만 맥북은 본질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맥북은 그 사람의 기준에서 어딘가로 이동을 한 거지 없어진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맥북이 질려도 맥북은 맥북이죠. 

자 이제 이 방식을 택했다치고,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해봅시다. “그게 거기에 왜 있지?” 사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 사물의 본질이 왜 그거지?” 본질의 유무가 그 사물의 있음과 없음의 기준이 되니까요. 

다시 답해봅시다. “그 사물의 본질이 왜 그거지?”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누가 본질을 정했는지에 대해 알아야겠죠. 누구입니까. 누가 이 세계의 사물에게 본질을 주었나요. 일단 저는 아닙니다. 여러분인가요? 아닐걸요. 그러면 과학자들인가요? 정치인? 종교지도자? 철학자? 아마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할 겁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올라가다 보면 결국 이 분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신. 절대자. 창조주요. 즉 신의 뜻이 바로 사물이 거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사물의 본질은 절대적입니다. 누구도 신이 정한 본질에 도전할 수 없죠. 또한 보편적이기도 합니다. 감히 신이 정한 본질에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요. 만약 누군가 그 본질에 반대한다면 그 사람이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거죠. 동시에 그 본질은 불변합니다. 어찌 신이 정한 본질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변하는 건 우리의 마음이죠.

신이 만든 본질의 세계관에서 세계는 펼쳐져 있습니다. 신이 창조해 낸 세계는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져서 움직이는 중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에 놓여있는 사물들의 본질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신에게 경외를 표할 뿐이죠.


두 번째 해결책

두 번째 방법입니다. 지금까지의 문제는 모두 본질이 하나라고 생각해서 나타난 문제입니다. 이 생각을 바꾸는 겁니다. n명의 사람만큼 n개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100명의 사람이 맥북을 가졌다면 맥북의 본질이 100개 있는 겁니다. 제가 맥북의 본질이 ‘빠른 성능’이라고 생각했다면 애플이 만들었든 샤오미가 만들었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애플에서 정말 별로인 디자인으로 신형 맥북을 출시했다고 칩시다. 분명 누군가는 “저건 맥북이 아니야!”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맥북의 본질은 ‘미니멀하고 세련된 디자인’입니다. 그러니 디자인이 별로라면 애플에서 만들었든 성능이 좋든 그 사람에게는 맥북이 아닙니다. 

이제 이 방식으로 질문에 답해봅시다. “그게 거기에 왜 있지?” 왜 있겠어요. 그게 필요하니까 있죠. 사물의 본질은 내가 정하는 거고 그 본질이 바로 사물이 있는 이유입니다. 사물이 있는 이유는 n명의 사람만큼 있습니다. 모든 기준은 ‘나’가 되는 거죠.

이러한 세계관에서 사물의 본질은 상대적입니다. 제가 정한 본질이 가지는 권위 따위는 없죠. 또한 개별적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본질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수가 동의하는 공통된 본질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떤 권위를 가지지는 못합니다. 동시에 그 본질은 항상 변합니다. 제가 오늘 정한 본질은 내일이면 바뀔 수 있어요.

‘나’가 만들어낸 본질이 있는 세계관에서 세계는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드러내야 하죠. 우리가 볼 수 있고 본질을 부여할 수 있는 만큼이 우리의 세계인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물들이 우리 앞에 있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찾아내고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본질이 없어진다면 그 사물을 폐기시킵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예시를 들며 설명한다면 이해가 더 쉽겠습니다만,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이 두 세계관에는 너무 많은 철학 이론들이 얽히고설켜있어요. 그렇기에 구체적인 예시를 들기 시작하면 오류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론들은 여러분이 철학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실 겁니다. 그 이론들을 알기 위해서 여기서는 두 세계관의 차이를 ‘대충’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장 간단하게 이해해 봅시다. 사물이 있는 이유는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신에게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와 그 세계에 있는 사물들의 ‘있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세계가 있습니다. 거울을 봅시다. ‘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존재론으로 ‘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나’가 여기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나’는 왜 있을까요. 밖은 실컷 보았습니다. 이제는 안을 한번 봐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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