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는 건 무엇인가_존재론
책의 첫 장에서 저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이렇게 정의 내렸습니다. “철학적 질문은 나와 세계,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그 후 우리는 존재론을 통해 세계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있는지 알아보았죠. 정신없이 ‘있음’에 대해 알아보느라 우리는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습니다. ‘나’입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 거실에서 개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어머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아버지. 일리노이에서 논문 쓰느라 바쁜 누나. 우리 모두 말입니다.
나는 뭘까요. 이것도 역시 생각나는 대로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제 이름은 강인성. 1994년에 태어났습니다. 인하대학교 철학과 13학번 졸업생이고요. 취미철학의 저자입니다. 철학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신우경과 강진한의 아들이고요. 대한민국의 시민입니다. 노란 피부를 가진 황인이기도 합니다. 인간이고요. 포유류입니다. 척추동물에 속합니다. 정확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죠.
우리는 무언가가 왜 있는가에 대해 알려면 먼저 본질을 파악해야 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방금 적은 저에 대한 내용 중에 본질이 있을까요? 이게 아니면 강인성이 아니다, 하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요. 확실히 아닌 것도 있고 본질처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봐보죠.
제 이름 석자 강인성.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이름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본질에서 탈락이죠. 1994년에 태어남. 솔직히 말하면 94년에 태어났는지 93년에 태어났는지 제 알바가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그러니 역시 탈락입니다. 인하대학교 13학번 철학과 졸업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원해서 가긴 했지만 아니었어도 저는 저입니다.
신우경과 강진한의 아들임. 어머니와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것이 저의 본질일 수 있겠습니다. 예시로도 섬찟하지만, 만약 제가 배 다른 자식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아들로서는 폐기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저를 폐기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누가 어떻게 낳았든 여전히 저는 저니까요.
대한민국의 시민임. 국적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바꿔야겠죠.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니고요. 노란 피부를 가진 황인임. 저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이긴 합니다. 이걸 바꾸긴 쉽지 않죠. 그러나 상상력을 발휘해 봅시다. 제가 어느 날 흑인이 되고 싶어 엄청난 성형수술을 감내하는 겁니다. 진한 쌍꺼풀에 두꺼운 입술, 까만 피부. 이제는 누가 봐도 어엿한 흑인입니다. 그러면 저는 폐기되고 새로운 제가 나타난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저는 저로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인간임. 이게 가장 본질에 가까워 보입니다. 제가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그때도 저는 제가 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책상이나 개가 된다면 저는 제가 아니게 될 가능성이 크죠. 드디어 부정할 수 없는 저의 본질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저의 본질이 인간이라 하는 건 마치 제 앞에 있는 책상의 본질이 책상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질이란 책상을 책상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상을 책상답게 하는 게 ‘책상임’이라는 특징이라뇨. 대체 ‘책상임’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이러면 다시 또 책상의 본질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즉 ‘나’의 본질을 찾기 위해선 인간의 본질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죠.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려있음. 언어를 사용함. 두뇌를 통해 지능활동을 할 수 있음 등등. 몇 가지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그러한 본질이 없다면 저는 제가 아니게 되는 걸까요?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어느 날 갑자기 딱정벌레가 되어버린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그레고리는 직장을 잃은 아버지를 대신해 외판사원으로 가족을 먹여 살립니다. 아침 다섯이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방에서 나무조각이나 하는 게 전부인 삶을 살죠. 하나뿐인 여동생을 음대에 보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진 채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이유나 계기도 없이, 딱정벌레가 됩니다. 그것도 거대한 딱정벌레가요. 손이 없으니 글씨도 못쓰고 말도 못 합니다. 완벽하게 인간이라는 본질을 상실해 버린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족들은 정황상 방에 있는 거대한 딱정벌레가 그레고르라는 걸 눈치챘다는 겁니다. 그러나 해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워낙에 흉측하니 밖에 데리고 나갈 수도 없죠. 매일 음식물쓰레기를 조금 넣어주고 잘 기어 다닐 수 있게 옷장을 치워주는 정도입니다. 유일하게 돈을 벌어오던 그레고르가 저 지경이니 가족들은 점점 궁핍해집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고 상처를 입습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상처는 점점 악화되고 결국 그레고르는 쓸쓸히 방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유일하게 저 벌레가 그레고르라는 걸 믿지 않던 파출부에 의해 쓰레기장에 버려지죠. 인간이라는 본질을 잃고 아버지와 가정부에 의해 폐기된 셈입니다.
그레고르의 아버지에게 있어 그레고르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림’이었을 겁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게 아니라 어떤 질병으로 돈을 벌지 못했어도 아버지는 그레고르를 폐기하려 했을 거예요. 파출부에게는 어떤가요. 파출부에게 그레고르의 본질은 ‘인간의 외형을 지님’이었을 겁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거대한 딱정벌레가 그레고르의 방 안에 있다면, 그건 그레고르가 아니라 딱정벌레인 겁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그레고르의 본질에 대해 물어봅시다. 그레고르 본인입니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거대한 딱정벌레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자신의 본질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괴롭고 힘들지만, 그레고르는 여전히 스스로를 그레고르라 생각합니다. 밖에 나가서 돈도 못 벌고, 말도 못 하고 팔다리도 없는, 겉은 딱딱한 껍데기로 덮여있고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딱정벌레의 모습이지만 여전히 나는 나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인간의 본질이 아닙니다. ‘나’의 본질입니다. 나의 본질을 찾는 데 있어서 나의 생각이 중요할까요 타인의 생각이 중요할까요. 어느 날 책상이 “제 본질은 무언가를 올려놓을 수 있음이 아닙니다!”라고 한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책상을 말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생각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나의 본질을 찾아봅시다. 이름도, 출생도, 직업도, 심지어는 인간이라는 사실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건가요.
이것 역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보다도 더 중요하고 큰 누군가를 찾아서 그분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누가 있을까요. 선생님? 철학자? 과학자? 에이. 이왕 물어보는 거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낫죠. 맞습니다. 바로 신입니다. 신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신이시여. 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신의 창조물 중 하나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물이 이유 없이 만들어지진 않았겠죠. 우리는 그걸 찾고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신의 뜻을 거역한다는 건 우리의 본질을 훼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본질을 내려준 신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죠.
여기서 말하는 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이지, 그 신의 뜻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글은 최대한 큰 범위에서의 설명으로 감을 잡는 게 목적이니까요.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차피 뒤에 철학사 파트에서 다 나올 겁니다.
두 번째 방법입니다. 나 스스로에게서 찾는 방법이죠. 나의 본질을 내가 정하는 겁니다. ‘강인성’ 이름 세 글자도 좋습니다. 작가, 철학자도 좋죠. 신우경과 강진한의 아들도 훌륭합니다. 대한민국의 시민도 좋은 본질이 될 수 있어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것이 나의 본질이라고 정했다면 그게 내가 있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그걸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거죠.
이것이 인간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물은 스스로 본질을 정할 수 없습니다. 신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누군가가 본질을 정해주어야만 시공간을 점유합니다. 그 본질은 실재의 세계에 있는 거고요. 사물은 그 본질이 없어지는 순간 폐기됩니다. 신에 의해서든 인간에 의해서든요.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정합니다. 인간은 현상의 세계에 있는 사물 중 유일하게 실재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실재의 세계에서 자신의 본질을 찾는 겁니다. 그 본질이 바로 우리가 이 세계에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폐기처분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나의 본질이 훼손되었다 생각하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죠.
그럴싸하죠? 스스로의 본질을 스스로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습니다. 본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불변한다는 겁니다. 본질은 변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의 무지와 오해로 본질을 잘못 이해해서 수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굉장히 엄밀하고 조심히 해야 합니다. 본질은 함부로 바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정하다 보면 그게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게 벌어진다는 겁니다. 다시 그레고르의 경우를 봅시다. 그레고르는 스스로의 본질을 ‘외판사원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들’로 결정지었습니다. 물론 외적인 압박이 조금, 아니 상당히 있었지만요. 그러나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딱정벌레가 되며 그 본질이 송두리 채 날아가버립니다. 그렇다면 그레고르는 스스로를 폐기처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스스로 딱정벌레가 되고 나서야 그게 본질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거죠.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벌어집니다. 축구선수를 자신의 본질로 정했지만 부상으로 축구를 할 수 없게 된 사람.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지만 자식을 잃고만 부모님. 불길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걸 소명으로 받들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던 소방관 등등. 모두 스스로 정한 본질이 훼손되었으므로 스스로를 폐기처분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죠.
그렇다면 결국 다시 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혹시 본질 같은 건 없는 걸까요? 알고 보니 본질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었던 걸까요. 이 문제 역시 철학사 전체가 매달린 문제입니다. 다행인 건 많은 철학의 천재들이 자신이 찾은 답을 잘 정리해 주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 철학을 통해 이 문제의 답을 찾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벌어지는 핵심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시공간을 점유한 채 살아가는 사물 들인데, 문제는 이 세계라는 게 끊임없이 운동을 한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운동하는 세계 속에서 불변하는 본질을 찾아야 한다니요. 이건 마치 덜컹이는 차 안에서 연필을 세우는 일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계를 좀 똑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