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건 무엇인가_인식론
거기 있습니다. 책상, 맥북, 키보드 등등. 이제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지겹네요. 지금까지 우리는 있는 것들, 그리고 있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 과정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여’ ‘알아내는’ 과정이었죠. 그리하여 변화하는 형상을 지닌 개별자가 있는 현상의 세계와 불변하는 본질을 지닌 보편자가 있는 실재의 세계가 나뉘어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두 세계 중 어느 한 편의 손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없다는 것까지도요.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을 제대로 봐야만 합니다.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제대로 알 수 없으니까요. 이제 ‘있음’과 ‘있는 것’ 말고 다른 걸 문제 삼을 때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있는 것 들에서 우리로 바꿔보자고요.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을 제대로 보고 있나요? 보고 있다는 건 뭔가요?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을 제대로 알려면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게 아니면 보는 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걸까요? 제대로 알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안다는 건 뭘까요?
이제부터 우리가 저글링 해 볼 개념은 ‘앎’입니다. ‘앎’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철학을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인식론이라고 하니 ‘인식’하는 행위에 대해서 다루는 철학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식의 범위에는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포함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눈을 감아도 벌어지는 일까지도 다루는 거죠.
우리는 존재론에서 거대한 세 가지 철학적 질문 중 두 질문을 다루었습니다. “나는 누구지?”와 “세계란 뭐지?”요. 인식론은 나머지 한 질문에 대해서 다룹니다. “나와 세계는 어떤 관계지?” 말이에요. 인식론은 결국 세계를 보는 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철학이거든요.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인식론에도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존재론에서 말한 주의사항이랑 비슷합니다. 인식론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끝없는 의심의 연속입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할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은 넣어두십시오.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인식론에서 원하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부동한 사실에 대한 앎’이거든요. 그러니 쉽게 지치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주의사항입니다. 인식론에서 주로 다루는 건 확고부동한 사실에 대해 알기 위한 ‘방법’들입니다. 그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죠. ‘방법’은 ‘사실’과 다르게 어느 하나가 맞고 어느 하나가 틀리지 않습니다. 서로 상호보완적이죠. 그러다 보니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맞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철학을 전개해 가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확실하게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확고부동한 사실을 알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겁니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은 건 없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지금까지 책상을 참 많이도 괴롭혔습니다. 책상 하나 가지고 150억 년 전까지 갔으니 말 다했죠. 그렇다고 여기서 다른 예시를 드는 것도 이상하니 계속 책상으로 가봅시다. 이야기의 편의를 위해 제삼자를 모셔보겠습니다. 인성이 나와주세요. 나왔습니다. 이제부터 책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인성이의 모험이 시작됩니다.
인성이 앞에 책상이 있습니다. 인성이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요?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방법은 눈으로 보는 겁니다. 뭐가 됐든 눈으로 보는 게 제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죠. 눈으로 보니 어두운 갈색이군요. 나무의 물결무늬도 보이고요. 표면이 반들반들한 게 조명이 살짝 비쳐 보입니다.
그다음 손으로 느껴봅시다. 책상이 만져지는 걸 보니 인성이 앞에 책상이 있는 게 확실하군요. 딱딱하지만 맨질맨질합니다. 물결무늬 사이로 얕은 홈도 느껴지고요. 나무 특유의 따뜻함마저 느껴집니다.
본다. 만진다. 모두 감각기관을 통해 아는 방법입니다. 비숫한 방법으로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소리를 듣는 방법이 있죠. 감각기관을 통하는 방법은 가장 빠르고 확실한 결과를 줍니다. 그 결과는 부정할 수 없는 결과이죠.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의 정보를 모읍니다. 딱딱하고, 달콤하고, 사각형이고 등등. 이렇게 수집한 정보가 사물의 ‘속성’입니다. ‘속성’은 ‘개별자’를 이해하기 위한 정보입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개별자의 속성을 알아내는 방법이 사물에 대해 아는 첫 번째 방법, ‘관찰’입니다.
관찰을 통해 책상의 속성을 수집하던 그때, 인성이의 친구가 쓱 다가와 제가 적어놓은 책상의 속성을 읽어봅니다. 그러더니 무심히 말합니다.
“어떻게 이게 어두운 갈색이냐? 붉은색이지.”
당황스럽습니다. 인성이는 자신의 눈과 친구의 눈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이 책상을 보고 붉은색이라 합니다. 인성이 눈에는 분명히 어두운 갈색인데요. 책상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색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관찰의 첫 번째 문제점입니다. 만약 아주 밝은 조명 아래에서 책상을 본다면 붉은색일 겁니다. 하지만 캄캄한 밤에 본다면 검은색이 되죠.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정보값이 변하는 문제가 있는 겁니다. 즉 관찰을 통해 얻은 정보는 보편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인성이는 속성을 적어둔 종이를 들고 방에 들어가 고민에 빠집니다. 내가 뭘 잘못 본 걸까? 그때 인성이의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그 종이를 읽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뭐에 대해 적은 거니? 나무침대?”
이럴 수가. 충격적입니다. 기껏 책상을 관찰해 얻은 속성을 적어두었더니 나무침대라니요.
두 번째 문제점입니다. 책상에 대한 속성을 아무리 많이 모은다고 한들 그게 책상이 되지는 못합니다. 나무로 만듦. 다리가 있음. 갈색임. 딱딱하고 매끈함. 50KG임. 2m임 등등등…. 이렇게 그 속성들의 합치면 책상이라는 사물이 나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책상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에선 아무리 많은 정보가 있어도 건너뛰는 구간이 반드시 생깁니다.
- 두 번째 아는 방법: 생각
그러면 관찰 말고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왜 없어요. 책상에서 눈을 떼는 겁니다. 인성이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생각합니다. 책상이란 뭘까. 책상이란 뭘까. 뭘까요? 나무로 만듦? 철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탈락. 다리가 있음? 다리 없이 통으로 만들어진 책상도 있으니 역시 탈락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재질이나 형태, 수치 같은 걸로는 책상을 정의 내리기 어렵습니다.
생각의 방향을 바꿔봅시다. 왜 인성이는 자신 앞의 책상을 나무침대가 아니라 책상이라고 인식했을까요. 그건 인성이가 그걸 책상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책상으로 이용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무언가를 올려놓고 작업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무언가를 올려놓고 작업을 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건 책상이 아니게 될 겁니다. 드디어 확실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책상은 ‘무언가를 올려놓고 작업을 하는 사물’입니다.
인성이의 생각의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책상은 무언가를 올려놓고 작업을 하는 어떤 사물이다.
2.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물에다 무언가를 올려놓고 작업을 했다.
- 결론: 고로 내 앞에 있는 사물은 책상이다.
참으로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을 통하면 사물의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본질은 보편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이고요. 즉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건 보편자가 가진 본질입니다.
책상에 대한 깨달음으로 신이 난 인성이가 친구에게 달려갑니다.
“친구야. 드디어 책상에 대한 사실을 알아냈다.”
친구가 묻습니다.
“그래? 뭔데?”
인성이가 답합니다.
“책상이란 무언가를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물이야! 그게 아니면 책상이 아니지.”
인성이의 대답을 들은 친구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그런 당연한 얘기를 나한테 하는 거니? 그래서 네 책상은 어떤 책상이냐고.”
당황스럽습니다. 생각으로 얻어낸 책상의 본질을 보고 당연한 이야기라니요.
이것이 생각의 첫 번째 문제입니다. 생각을 통해 얻은 정보는 실제로 앞에 있는 책상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가 궁금한 건 우리 앞에 있는 책상입니다. 우리 앞의 책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얼마나 크며 어떻게 생긴 건지가 궁금하죠. 즉 생각을 통해 얻은 정보는 실제성이 부족합니다.
인성이는 친구 앞에서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다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뭐가 잘못된 걸까요. 그때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옵니다.
“누워서 뭘 하고 있었던 거니?”
인성이가 답합니다.
“책상에 대한 확고부동한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어머 그러니? 나도 한번 생각해 봤는데. 내 생각엔 책상 안에 있는 정령이 책상을 책상답게 만드는 것 같아.”
이건 웬 뜬구름 잡는 소리입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령이 책상을 책상답게 한다니요. 인성이는 어머니에게 한 소리 하려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가 말한 본질과 내가 말한 본질에 어떤 차이가 있지? 내가 찾은 본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건데?’
생각의 두 번째 문제점입니다. 생각은 결국 눈앞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합니다. 논리적 전개만 맞다면 책상의 본질이 책상의 정령이 될 수도 있죠. 실제적인 관찰 없이 이루어지기에 뜬구름 잡는 소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생각에는 없는 것도 있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떤 방법이 더 나아 보이나요? 두 방법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현상의 세계가 중요하다 생각한다면 관찰을 주된 방법으로 사용할 겁니다. 반대로 실재의 세계가 중요하다 생각한다면 생각을 주로 이용하겠죠. 이 두 방법은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들입니다. 인성이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인성이는 정신을 차리고 위의 문제점들을 극복해보려 합니다. 먼저 관찰부터 제대로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