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는 건 무엇인가_존재론
변합니다. 변하네요. 어느덧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변화했습니다. 작년에 비해 올해 저의 글쓰기 솜씨도 변화했고요. 운동을 꾸준히 하니 몸도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기온도 변하고 있고 미국의 금리도 변하고 있습니다. 마당의 풀들은 끊임없이 자라며 저를 귀찮게 하고 있고요. 냉장고에 넣어둔 멸치볶음은 언제 변할지 모르니 얼른 먹어야 합니다. 이 책이 나올 때쯤이면 미국의 정권도 변화했으려나요. 여러분도 이 책을 읽고 작은 변화를 맞이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음’과 ‘없음’에 대한 저글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물은 있거나 없거나의 상태만 가지지 않습니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미래라는 방향으로만 가는 시간에 맞춰서 사물은 성장하고 낡아지고 떨어지고 올라가고를 반복합니다. 즉 모든 사물은 ‘변화’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셈이죠.
변화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존재론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있음’에 대한 비밀이죠. 왜 비밀로 했냐면요, 너무 많이 알면 다치거든요. 농담이 아닙니다. 안 그래도 쉽지 않은 문제인데 너무 많은 선행지식이 들어오면 오히려 헷갈립니다. 여러분들이 이 정신없는 존재론을 어느 정도 따라왔으니 지금까지 말 못 한 중요한 사실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바로 정관사 be의 문제입니다.
지금 제가 풀어내고 있는 존재론은 서양의 철학입니다. 서양의 언어로 쓰인 철학인 거죠. 서양 언어의 대표인 영어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있음’의 자리에 속하는 단어인 정관사 ‘be’입니다. ‘be’는 술어입니다. 술어가 문장의 뒤에 오는 한국어와 다르게 영어에서는 문장의 시작이 되는 주어 바로 뒤에 나오죠. 문제는 ‘be’가 두 가지 뜻을 가진다는 겁니다.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1. there is apple
2. Apple is green
영어가 짧은 관계로 지극히 단순한 예시를 들 수밖에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1번 문장의 뜻은 "거기에 사과가 있다."입니다. 여기서 ‘be’는 -있다의 뜻입니다. 2번 문장의 뜻은 “사과는 초록색이다”입니다. 여기서도 ‘be’가 -있다의 뜻으로 쓰이나요? 그러면 번역을 “사과는 초록색 있다.”로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죠. 여기서 ‘be’는 -이다의 뜻입니다. 이렇게 ‘be’에는 -있다와 -이다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한국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다’와 ‘-있다’는 분명히 구분해서 씁니다. 계속해서 사과로 예를 들어보죠
1. 사과는 초록색이다
2. 사과에는 초록색이 있다
1. 사과가 거기에 있다
2. 거기에 있는 것은 사과이다.
1번 문장은 자연스럽습니다. 늘 쓰는 표현이죠. 2번 문장은 어떠신가요.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누군가 이런 문장을 쓰면 ‘그리스에서 왔나…?’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영어로 번역하면 두 문장 다 ‘apple is green’ 그리고 ‘There is apple’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있음’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문제는 영어에서는 ‘있음’=‘임’이라는 겁니다. 즉 ‘있음’에 대해서 알아본다는 건 ‘임’에 대해서 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임’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있음’에 대해서 알아보는 거고요.
제 앞에 있는 사과는 초록색입니다. 하지만 존재론을 익히고 싶다면 이 문장을 이렇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 앞에 있는 사과에는 초록색이 있습니다.”라고요. 존재론에서 만큼은 -이다와 -있음을 동시에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사고방식의 전환이 생깁니다.
이제 변화에 대해서 말해볼 때입니다.
사과나무에 달려 있는 사과가 익어갑니다. 초록색이었던 사과가 빨간색으로 변해가죠. 아오리사과도 맛있지만 역시 사과는 홍옥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여기서 사과는 분명히 변화했습니다.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이제 이걸 정제된 문장으로 옮겨보죠.
-초록색'이던' 사과가 빨간색으로 변화했다.
여기서 쓰인 be는 -이다의 뜻입니다. 이제 -이다의 자리를 -있다로 바꿔볼까요?
-초록색'이 있던' 사과가 빨간색이 '있게' 변화했다.
짜잔. 어떤가요. 상당히 낯설죠? 이제 더 낯설게 해 드리겠습니다.
사과가 초록색이라는 건 사과 안에 초록색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과가 빨간색이 된다는 건 초록색이 없어지고 빨간색이 생긴다는 뜻이고요. 즉 사과의 변화란 원래 있던 초록색이 없어지고 빨간색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다시 문장으로 옮겨보죠.
-초록색이 있던 사과가 초록색이 없어지고 빨간색이 생겼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직전의 글에서 ‘없음’이라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변화란 있던 것(초록색)이 없어지고 없던 것(빨간색)이 있어지는 과정입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무언가가 없다는 게 불가능한데 어떻게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있어질 수 있을까요? 이 논리에 따르면 변화란 불가능합니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기 때문이죠. 사과에 초록색은 있습니다. 빨간색은 없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죠? 저는 분명 저희 집 고추밭에 있는 고추가 초록색이었다 빨간색이 되는 걸 봤습니다. 저희 집 냉장고에는 초록색 사과도 있고 빨간색 사과도 있단 말이에요. 사과를 깎으면 누렇게 갈변하기도 하고요. 없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변화는 있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없는 건 없다 했으니 있는 것들로 해결해 보자고요.
하늘에서 비가 내립니다. 비는 땅으로 스며들죠. 땅으로 스며든 비는 사과나무의 뿌리를 타고 줄기로, 이파리로, 사과로 향합니다. 비가 그쳤네요. 구름이 걷히고 해가 뜹니다. 빗물을 머금은 이파리가 해의 뜨거움을 받습니다. 이파리가 받은 뜨거움은 다시 사과로, 줄기로, 뿌리로 향합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지나면 사과 안에 있던 초록색은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그 초록색의 빈자리를 빨간색이 대신 채우죠.
우리는 초록색이었던 사과가 어떻게 빨간색이 되어가는지 분자 단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사과 내부에 있는 화학구조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죠. 움직임. 운동. 이것이 변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입니다. 사실 모든 변화는 움직임의 결과인 거죠. 사과의 초록색이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과의 초록색이 움직였고 그 자리를 빨간색이 차지한 겁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없음은 불가능하므로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설명이 해결돼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운동도 문제가 있습니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하나의 사고실험을 통해서 운동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말해보겠습니다. 이것도 만만치 않으니 손잡이 꽉 잡고 따라와 보세요.
제가 약속이 있어 강남역에서 신촌역으로 가려합니다. 이건 저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죠. 즉 저는 저의 위치를 강남역에서 신촌역으로 움직이려 합니다. 지하철을 탑니다. 오늘따라 자리가 많네요. 편안히 앉아서 갈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강남역에서 신촌역을 가기 위해선 신도림역을 지나야 합니다. 맞죠? 그리고 신도림역을 지나기 위해선 신림역을 지나야 하고요. 신림역을 지나기 위해선 낙성대역을 지나야 합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니 이해를 위해 숫자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에서 2로 가려합니다. 그러려면 0.5를 지나야 하죠. 0.5를 가려합니다. 그러려면 0.25를 지나야 하고요. 0.25를 지나기 위해선 0.125를, 0.125를 지나기 위해선 0.0625를 지나야 합니다. 그러면 0.0625를 지나기 위해서는요? 문제는 1과 0.0625 사이에 숫자로 가득 차있다는 겁니다. 그건 1과 0.000000001 사이에도 그렇죠. 그렇다면 1에서 2로 가는 건 가능이나 한 일인가요?
강남역에서 신촌역을 가는 건 당연히 가능합니다. 제가 저번주에 했거든요.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하고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운동이 가능합니다. 그 세계가 바로 현상의 세계입니다. 즉 현상의 세계에서는 사과가 초록색이었다 빨간색이 되는 게 가능하고 강남역에서 신촌역을 가는 게 가능합니다.
그러면 1에서 2로 가는 건 어떤가요? 가능해 보이나요? 당연히 가능해 보이지만 그러려면 위의 논리에 반박을 해야 합니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숫자 1과 2가 있는 세계는 실재의 세계입니다. 경험도, 관찰도, 감각도 불가능한 세계이죠. 오직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언어와 수식으로 옮기는 것만 가능합니다. 이 세계에서 사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1에서 2로 갈 수도 없습니다.
변화, 혹은 운동이 가능하다고 얘기하면 실재의 세계가 섭섭해할 겁니다. 나는 여기 멀쩡히 변하지 않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사과의 색이 아무리 변해도 난 변하지 않는다. 사과를 사과답게 만드는 불변하는 실재가 중요하지 왔다 갔다 변하기나 하는 현상이 뭐가 중요하냐. 변화 같은 건 모두 허상이고 착각이다,라고 할 거예요.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면 현상의 세계가 버럭하고 화를 낼 겁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지금 여기서 변하고 있는 게 안 보이냐. 네가 두 발 딛고 서있는 곳이 어디냐. 네가 먹고 있는 사과가 있는 곳이 어디냐. 바로 현상의 세계 아니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는 실제가 뭐가 중요하냐. 실재 같은 것 없이도 사과는 충분히 사과다울수 있다,라고 현상의 세계가 말하겠죠.
이렇게 변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실재의 세계를 믿는 겁니다. 이 경우에 변화 혹은 운동은 현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착각이 됩니다. 두 번째는 현상의 세계를 믿는 겁니다. 이 경우에 불변하는 실재의 세계를 없어져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여기서 답을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답을 내리진 못하지만 한 가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실재와 현상의 문제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부디 현상이든 실재든 어느 하나가 더 답에 가깝다는 견해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이 저글링이 재밌어집니다. 현상과 실재는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저글링 하게 되면 나머지 개념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존재론에서 다루는 개념들을 저글링 해보았습니다. 있음. 없음. 변화. 이 세 가지를 통해 현상과 실재가 무엇인지 까지 알아보았죠. 이제 대충 뭐가 있고 없고 어떻게 변하고 안 변하고는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이 빠진 것 같아요. 있는 것도 알겠고 없는 것도 알겠는 게, 도대체 왜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