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는 건 무엇인가_존재론
없습니다. 없네요. 뭐가 없죠? 일단 저는 애인이 없습니다. 슬프네요. 개는 세 마리나 있지만 고양이는 없고요. 맥북을 쓰고 있어서 데스크톱도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땅에 정의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죠. 있으면 참 좋겠지만 상용가능한 상온 상압 초전도체도 없고 핵융합발전기도 없습니다. 유니콘도 없고 요정도 없죠.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산타클로스도 없습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없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재미가 없다, 시간이 없다, 재능이 없다, 돈이 없다, 꿈도 희망도 없다 등등.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말들이죠. 어른들 말씀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자꾸 없다 없다 하면 진짜로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무언가가 없다는 말을 줄일 수 있도록 제가 없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보여드리죠.
없음이란 뭘까요. 있음의 반대말이겠죠. 그렇다면 있음이 가지는 의미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없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있다는 건 뭐였죠? 1.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음 2. 속성을 가지고 있음 3. 본질이 있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없다는 건 1.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2. 속성을 가지지 않고 3. 본질이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이제 위에서 든 예시들이 이러한 조건에 맞는지 한번 따져봅시다.
“고양이는 없다.”라는 말의 엄밀한 의미는 “나와 반려의 관계를 맺은 고양이가 없다.”입니다. 사실 저희 집 마당에는 길고양이 두 마리가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주는 밥을 먹으러 뻔질나게 들락날락거리죠. 실제로 없는 건 반려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속성이 없는 거죠. 고양이 자체는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없다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정의는 없다.”는 어떨까요. ‘어떠한 범죄자가 적법한 판결을 받았다.’라는 시공간을 점유한 행동이 가지는 본질이 바로 정의입니다. 즉 정의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행위가 이 땅 위에 없다면 정의도 없겠죠. 그렇다면 그 행동은 정말 없나요? 그 수가 적은 거지 없다고 하긴 어렵죠.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따르지 않음으로 이것도 탈락입니다.
“상온 상압 초전도체는 없다.”는 어떤가요. 많은 과학자들에게 이 문장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생각해 봅시다. 발견하지 못함과 없음은 같은 말인가요? 우리는 발견하지 못했다가 발견한 무수히 많은 예시들을 압니다. 원자, 전기, 블랙홀, 중력파 등등. 15세기엔 블랙홀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15세기엔 블랙홀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죠. 우리는 초전도체의 본질은 압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속성은 아직 알지 못해 어떤 시공간을 점유하는지 모르는 거죠. 본질은 있으므로 이 역시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를 따르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산타클로스는 없다.”는 어떤가요. 핀란드의 산타 마을에 가면 정부에서 공식으로 인증한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하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산타와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매년 12월 25일이 되면 루돌프를 타고 전 세계를 돌며 울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정말로 없을까요?
우선 시공간을 점유하는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 그걸 있다고 하기는 좀 곤란하죠. 그러나 속성은 차고 넘칩니다. 흰 수염에 빨간 바지. 배불뚝이에 풍만한 몸. 인자한 미소의 할아버지가 바로 산타클로스의 속성입니다. 본질도 있죠.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누군가. 그게 바로 산타의 본질입니다. 속성도 있고 본질도 있는 산타를 없다고 할 수 있나요?
“아니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없는 게 어딨 나!”하고 소리치고 싶으신 분들이 있으실 거예요. 그런 분들은 화를 가라앉히고 자신이 한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없는 게’ 어디 ‘있나’. 없는 게 어떻게 있나요. 없으면 없어야죠. 없는 것을 어디서 찾는단 말입니까. 다시 한번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무언가에 대해서 설명 가능하려면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무언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건 그 무언가가 있다는 걸 의미하죠. 무언가가 없다는 걸 설명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의 없음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산타클로스가 없다면 우리는 산타클로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초전도체가 없다면 우리는 초전도체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없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그것이 우리가 없음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예시로 들만한 것조차 없어요. 뭐가 없는지도 모르는데 없음에 대해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과연 없는 것이 있을까요? 없는 것이 없다면 없음이란 상태는 있을 수 있을까요?
없는 건 없다. 그러니 없음도 없다. 그 말은 즉 세상 모든 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저도 압니다. 이건 꽤나 과격한, 말장난에 가까운 주장입니다. 다행히도 이러한 주장이 철학에서 정답은 아닙니다. 다만 철학 발전에 중요한 길목에 있는 주장은 맞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개념을 저글링 하는 거고, 지금은 ‘없음’이라는 개념을 저글링 중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그 저글링을 이해하고 따라오는 게 중요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계속 가봅시다.
이 주장의 가장 강력한 반박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현실이라 함은 사물이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세계를 뜻합니다. 속성이고 본질이고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건 우리 눈앞의 실제 세계, 현실입니다. 거기에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이 두 가지 논리 모두 중요합니다. 없다고 하자니 속성과 본질은 있고, 있다고 하자니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는 않는 무언가가 너무 많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시공간을 점유한 사물의 형태와 속성보다 본질이 훨씬 중요하다는 겁니다. 책상을 책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무, 바위, 다리가 있음, 위가 평평함, 이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책상을 책상으로 만드는 건 ‘무언가를 올려놓고 작업할 수 있음’이라는 본질이죠. 아무리 속성들을 모아놓아도 그게 본질이 되지는 않습니다.
실재의 세계가 열린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없는 건 없다.’와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건 있다.’ 두 가지 논리를 모두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다시 한번 정리하죠. 철학에서는 두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현상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요.
현상의 세계는 시공간을 점유하는 사물들의 세계입니다. 우리 눈앞의 책상, 우리가 그린 삼각형, 핀란드 정부가 인증한 산타클로스와 같은 개별자가 있는 세계이죠. 이 세계는 감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변화가 가능한 세계입니다. 사물의 속성과 형태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이죠.
실재의 세계는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본질들의 세계입니다. 책상을 책상답게 만드는 무언가. 우리가 다양한 책상을 보고 모두 책상이라고 생각 가능하게 만드는 무언가의 세계이죠. 세 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와 같은 보편자가 있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감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성으로만 알 수 있죠. 또한 변화가 불가능한 세계입니다. 사물의 본질이 변화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예상컨대 누군가는 이러한 철학이 불만스러우실 겁니다. 굳이 세계를 두 개로 나눠야 하나 싶을 수도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실재의 세계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거예요.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거든요. 그러니 일단은 두 개로 쪼개진 세계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쪼개놓고서 그걸 받아들이던지 반박하던지 하자고요.
새로운 키워드가 나왔습니다. ‘변화’입니다. 세계를 두 개로 쪼갰으니 이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살펴볼 때입니다. 생각해 보면 변화라는 것도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본질이 변화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물이 변화할 수 있죠? 사물이 변화하는데 어떻게 본질은 변화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까? 어쩌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모든 게 변화하는 건가요? 이제 ‘변화’라는 개념을 저글링 하러 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