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는 건 무엇인가_존재론
있네요. 있습니다. 제 앞에 책상이 있고요. 그 위에 노트북이 있습니다. 그 앞에 키보드도 있고 마우스도 있습니다. 정확히는 터치패드가 있죠. 맥북을 쓰고 있거든요. 글을 쓰며 듣고 있는 음악도 있습니다. 한국에는 강릉이라는 멋진 도시가 있죠. 저는 지금 강릉에 있는 공유오피스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강릉에서 글을 쓰는 저는 행복합니다. 행복도 있네요. 동시에 고독하기도 하고요. 고독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철학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철학도 있군요. 여러분 앞에는 무엇이 있나요. 제 책 취미철학이 있겠죠? 취미철학과 함께 재미도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 앞에 사물 들은 ‘있음’이라는 형태를 가집합니다. 철학의 관심사는 ‘사물의 있음’ 그 자체입니다. 그 질문에 답하는 철학을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라고 합니다. 뭔가 이름부터 멋있죠. 존재론과 형이상학은 같은 주제를 공유하지만 시선이 약간 다릅니다. 하지만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구분 짓는 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섞어서 쓰셔도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이 너무 신화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존재론이라고만 하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존재론을 익히실 때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이걸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건 사는데에 전혀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질문 그 자체예요. 그러니 일단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재껴두고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철학과 친해지고 저글링에 익숙해지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따라오다 보면 어느 순간 ‘이래서 이게 중요하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될 거예요.
둘째로는 “이건 답이 없는 질문이야.”라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정말로 답이 없다면 철학은 학문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찾기가 정말 정말 어려울 뿐, 답은 있습니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건 없습니다.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한 엄밀한 태도를 가져야 철학이 재밌어집니다.
다시 제 눈앞으로 돌아오죠. 맥북과 아이패드가 보이네요. 아이폰도 있고요. 책상, 의자, 서랍도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다룰 문제는 사물이 세계에 어떠한 방식으로 있는가입니다.
먼저 사물은 공간 속에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어느 시간에 있어야 하고요. 맥북은 지금이라는 시간과 제 앞이라는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제 앞에 있군요. 즉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지만 사물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지금 제 앞의 책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고 한쪽 면이 물결무늬입니다. 두 개의 넓은 다리가 양쪽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사물들은 각자만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언가를 ‘속성’이라고 합니다. 속성은 사물 안에 여러 개가 있습니다. 딱딱하고 푹신하고 따뜻하고 평평하고. 더 수치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m이고 20kg이고 30도씨이고 철로 되어 있고 등등이요. 속성은 변화가 가능합니다. 책상의 높이를 좀 줄여도 책상입니다. 나무로 만들어도 되고 바위로 만들어도 되죠. 속성은 사물 안에서 얼마든지 변화 가능합니다.
그러나 변화하면 안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책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이게 안되면 책상이 아니다고 할 만한 거요. 다리가 부러지거나 상판이 쪼개져서 무언가를 올려놓을 수 없다면 책상이 아니겠죠. 어떤 프로그램도 돌릴 수 없다면 맥북은 맥북이 아니게 될 거고요. ‘무언가를 올려놓을 수 있음’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음’ 같이 어떤 사물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을 ‘본질’이라고 합니다. 본질이 사라지면 그 사물은 사물로 남을 수 없게 됩니다.
시공간을 점유함. 속성들이 있음. 본질이 있어야 함. 이렇게 세 가지가 사물이 세계에 있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보죠. 제 앞에 있는 책상은 나무로 만든 물결무늬의 책상입니다. 하지만 제 뒤에는 플라스틱과 철로 만들어진 책상이 있죠. 스타벅스엔 다리 하나 달린 책상이 있고요. 이처럼 세계에는 정말 다양한 책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다양한 책상들을 보고 모두 ‘책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그건 다양한 책상들이 모두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음.”이라는 본질을요. 아무리 시공간을 점유한 형태와 속성이 달라져도 본질이 같다면 우리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책상들은 “책상”이라는 개념으로 묶입니다. 이렇게 본질을 공유하는 사물들을 묶을 수 있는 개념을 ‘보편자’라고 합니다.
보편자에 대한 예시를 더 들어볼까요. 책상과 의자, 서랍장은 ‘가구’로 묶일 수 있습니다. ‘가구’ 역시 보편자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인간’으로 묶입니다. 역시 보편자입니다. 보편자는 언제나 여럿에 대해서 말합니다. ‘책상’이라는 보편자 안에는 세상 모든 책상이 다 들어있죠. 반대로 딱 하나에 대해서만 말하는걸 ‘개별자’라고 합니다. 제 눈앞에 있고 이용 중인 이 책상. 이 책상은 개별자로 세계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이상해집니다. 보편자는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습니다. 또한 특정한 속성을 지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보편자는 있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대답은 안됩니다. 있던지 없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개별자로서 책상들은 이 세계에 시공간을 점유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편자로서‘책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떠올리는 그 “책상”은 있습니까? 모든 개별적인 책상들을 “책상”으로 묶는 그 “책상”이요. 그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하자니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없다고 하자니 우리는 ‘책상’에 대해 생각하고 ‘책상’에 대해 말합니다. 이 난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해결하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감을 잡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책상은 좀 지겨우니까 다른 걸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삼각형을 예시로 들어보죠.
삼각형은 참 많은 곳에 있습니다. 맛있는 삼각김밥에도 있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있죠. (생각보다 많진 않네요.) 무엇보다도 그냥 지금 연습장을 펼쳐서 슥삭하고 그리면 5초 만에 시공간을 점유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삼각형이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삼각형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모두 당연히 알고 계실 태지만, 그래도 한번 적어보죠.
삼각형 : 세 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진, 내각의 합이 180도인 도형
자. 이제 여러분이 그린 삼각형을 다시 봐봅시다. 컴퓨터로 그렸던 손으로 그렸던 상관없습니다. 언뜻 보면 세 개의 직선이 있고 내각의 합이 180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인가요? 그 삼각형에 있는 선이 직선이 맞습니까? 미세하게나마 곡률이 있지 않나요? 아니 애초에, 선이 맞기는 한가요? 확대해서 봐보십시오. 여러분의 삼각형에 있는 선이 선입니까, 면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분이 그린 삼각형은 삼각형이 아니라는 결론이 납니다. 세 개의 곡률이 있는 면으로 이루어진 무언가이죠. 삼각형의 본질을 지키지 못했는데 어떻게 삼각형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이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세계에 삼각형은 아예 있을 수가 없게 되어버려요. 제 아무리 고성능의 컴퓨터로 삼각형을 그려도 결국은 삼각형의 본질과 다를 겁니다. 삼각형이 없다니. 그건 좀 당황스럽죠. 삼각형이 없다면 우리는 있지도 않은 걸 배우고 그리고 응용한 셈이니까요.
분명히 개별자는 세계에 있지만, 보편자는 세계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보편자가 없다면 개별자를 묶을 수가 없습니다. 보편자 없이는 개별자를 설명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개별자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보편자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들이 낸 해결책은 세계를 둘로 쪼개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가 하나 더 있었던 거죠. 세계는 이제 두 개입니다. 먼저 사물이 있는 세계. 이 세계를 ‘현상’이라고 합니다. 제 앞의 책상이 있는 세계이고요. 여러분이 그린 삼각형이 있는 세계입니다. 즉 개별자들이 있는 세계이죠
그다음은 본질이 있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실재’라고 합니다. 모든 책상들을 포괄하는 책상이 있는 세계이고요, 세 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이 있는 세계입니다. 즉 보편자가 있는 세계가 바로 실재의 세계입니다.
실재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건 꽤나 괜찮은 해결책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그 실재의 세계가 어디에 어떻게 있느냐이죠. 이 질문이 바로 서양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입니다. 사실상 서양철학 전체가 이 실재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실재의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 방법도 하나 있습니다. 그냥 보편자 같은 건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굳이 실재라는 알쏭달쏭한 세계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없는데 그냥 쓰는 거다,라고 설명하면 될 일이죠. 우리는 평소에도 없는 것에 대해 잘만 말하거든요. 그런데 그 ‘없다’는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무언가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이상한 일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