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불리 회복이란 말을 쓰는 게 성급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인생은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지금부터 쓰는 이 글에 ‘회복일지’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에게 자꾸 친한 척을 하다 보면 정말 금세 친한 친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나도 내 일상을 회복과 치유로 물들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병원에 10분만 앉아 있어도 금방 알 수 있듯 세상에는 참 다양한 병이 있고 아픈 사람도 많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외래진료를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고 괴롭지 만은 않다. 몸이 정말 힘들 때는 잠깐 앉아 있는 시간도 고역이지만 병원에 있으면 마음이 조금 정갈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처럼 몸이 고장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아픈데 나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갑자기 찾아온 이 불청객을 이겨내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동질감, 혹은 연대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세상 외로운 길 잃은 사슴이지만 병원에서는 나도 그저 한 우리에서 같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수많은 양 떼 중의 양 한 마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동질감 때문인지 아님 아줌마가 되어서인지 처음 만난 옆자리 사람과 스스럼없이 내 병의 연대기에 대해 일장연설을 주고받기도 한다. 마치 내게 찾아온 이 놈이 연예인 가십거리라도 된 거마냥. 그러면 혈액 수치에 일희일비하며 마음을 졸이던 내 상황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고 완치 판정을 받은 분들, 아님 몇 년째 병마와 싸우고 있는 분들에 비하면 난 아직 초보 환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투병 기간 내가 절실히 느낀 바가 있다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금방 완치될 수 있다는 것처럼 허황된 믿음이 아니다. 아프건 건강하건 우리는 지금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인생은 그 하루들의 합이다. 그 하루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건 어떤 자리에 있건, 마음속에 긍정적인 방향키를 쥐고 있느냐 아니냐가 내 하루에 혹은 그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투병 기간 내 마음도 롤러코스터를 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겐 처음 이 병을 알았을 때의 좌절, 분노, 황망함을 거쳐 언젠가는 곧 나을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어떤 믿음이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내가 워낙 긍정적인 인간이어서라기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힘이 컸던 것 같다. 나 혼자 어떻게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아이들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부모님의 딸로 마냥 아프기만 하고 거기에 휩쓸려 떠다니기만 하는 것은 참 무책임한 짓이었다.
그래서 뭐든 노력해야 했고, 시간이 지나면 곧 회복하리라는 믿음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견디기 힘든 순간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준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전 내 멘털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있었다. 병원에서 친해져 1년 반이 다 되도록 거의 매일 안부를 주고받던 언니의 죽음을 맞닥뜨린 것이다. 4명이 있는 단톡방의 제일 맏언니로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우리 동생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늘 파이팅을 외치던 언니였다.
언니가 응급실을 오가고 입원 일수가 길어져도 난 걱정만 할 뿐 설마 언니가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언니의 부고 문자를 받았을 땐 꼭 저승사자를 만난 것 같았다. 나 역시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너무 무섭고 떨리고 믿기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 난 잠도 잘 못 자고 악몽을 꿨다. 시계를 보면 자꾸 4자만 보이고 마음이 늘 불안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예민하게 굴고 조금만 몸이 아파도 꼭 죽을 것처럼 괴로웠다.
이런 내 상황은 예기치 않은 코로나로 응급 입원을 하며 극에 달했다. 가끔은 다인실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던 1인 격리실이 마치 무기수로 투옥된 꽉 막힌 감옥 같아 숨이 막혔다. 게다가 목이 찢어질 듯 아팠고 입이 다 헐어 먹을 수도 없는 데다 독한 약만 먹으니 복통에 설사가 지속됐다.
사실 이 정도로 심하게 아픈 상황은 여러 번 있었으나 이렇게 괴롭고 힘들기는 처음이었다.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불안한 내 정신이 날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과연 내가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나도 언니처럼 병원에만 갇혀 있다 떠나는 건 아닐까?라는 극단적인 생각에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이 들었다.
‘언니의 죽음이 마냥 슬픈 것보다는 너도 그렇게 될 까봐 두려운 거구나.’
내 마음을 인정하고 생사가 자연스러운 일임을 인정하게 되자 어느새 점차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심호흡을 하며 지내다 보니 다시 예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나를 발견했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지금 주어진 내 삶도 감사하고 소중하다는 걸..
물론 가끔은 나도 다시 반항아가 된다. 내가 제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줘서 티격태격할 때, 몸이 아프다고 별거 아닌 일로 가족들에게 예민하게 구는 내 모습을 볼 때,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 좌절할 때. 지금 내가 겪어야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항아는 금세 따뜻한 집으로 되돌아온다. 내 마음속 한켠에는, 전처럼 언젠가는 내가 다시 멀쩡해 지리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고 힘들어도 참을만한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아 인생은 마음먹기 나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