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특해.”
아이들을 재운 후 술을 한 잔 마신 남편이 말했다.
“기특하다고? 뭐가?”
남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하더니, 자기가 아는 백혈병을 앓았던 사람들 중 내가 제일 오래 살아 있다며 내 등을 두드렸다. 오잉? 이 사람이 벌써 취한건가?
처음엔 병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두려웠던 나에게 마치 내가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렇지 얘기하는 남편이 신기했다.
남편은 누군가의 죽음이나 발병에 의연한 편이다. 양가부모님의 갖가지 발병소식, 우리보다 한참 어린 사촌동생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도 잠깐 한숨을 쉴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가끔은 너무 놀라 이것저것 캐묻고 걱정하던 내가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남편이 냉정하거나 무신경해서라기보단, 주변인의 질병과 죽음을 그만큼 많이 경험한 덕(?)이 아닐까 싶다. 입에 쉽게 올린다고 해서 그게 그 사람에게 주는 무게가 가볍다는 뜻은 아니니까.
나는 지금껏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누워있던 모습. 운구차를 타고 엄마와 이동하던 기억. 그리고 친구나 지인 부모님의 장례식장에 가 본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신랑은 학창 시절 친구가 눈앞에서 사고사를 당하는 장면도 목격했고, 같은 반 친구가 백혈병에 걸린 지 채 1년도 안돼 잘못되는 모습도 봤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초연한 듯 말하기까지 그 역시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괴로움을 겪었을까.
최근에는 한 달 새 부의금을 거의 100만 원이나 냈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우리 나이가 나이인 만큼 회사 동료나 친구 부모님들의 장례식장에 가야 할 일이 많아진 것이다. 더욱이 추운 겨울은 노숙자뿐 아니라 병약하고 지병이 있는 어르신들에게도 쥐약이다. 추위는 면역력이 취약한 우리 환자들에게 위험 요소인 셈이다. 우리 둘은 안타까운 소식에 위로를 표하는 동시에 죽음에 대해 편안히 이야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나 역시 신랑의 의견에 적극 동의했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내게도 겨울바람과 매서운 추위가 컨디션을 악화시키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맞아. 나도 이제 겨울이 더 싫어졌어. 추워서 돌아다니기도 힘들고, 잠깐 나갔다 오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고, 컨디션도 훅 떨어지는 것 같아. 빨리 겨울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자꾸 돌아다니지 좀 말고 집에 좀 있어!!”
역시나 현실적인 남편의 반응. 내가 바란 건 공감이었건만.ㅋ
그래도 이제 유난히 혹독했던 한 해가 가고 드디어 새 해가 왔다. 연말이 되면 들뜨는 마음은 잠시, 못다 하고 못 이룬 것들에 대해 아쉽고 후회되는 마음이 컸는데 이번엔 후련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온 이 불청객의 힘도 점점 약해지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래서 새해를 맞는 내 마음은 기쁨과 감사다. 문득 지난 병원 생활이 떠오르며 울컥하는 때도 있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고통스러운 시간도 지나고 보면 아름답게 포장되는 게 바로 시간의 힘인 것 같다.
그리고 해가 바뀔 때마다 내 다이어리를 채우던 운동, 여행, 자기 계발 등의 새해 계획은 ‘회복에 집중’으로 심플해졌다. 다이어리 한 켠엔 회복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써 내려가며 마음을 다졌다. 왠지 써보는 것만으로도 반은 이룬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브런치에 글 쓰는 일도 욕심내지 않고 무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
적절히 쓰면서 회복하기.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늘려 나가기.
그게 올해 나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