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외래가 있는 날이었다. 편도 1시간여 거리의 병원을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참 성가신 일이지만, 이젠 학교가는 학생처럼 그 시간이 너무 자연스럽다. 오늘은 살짝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얼마전 스테로이드를 끊었기 때문이다.
스테로이드는 골수이식 후 거부반응(일명 '숙주'라 한다)에 빠른 효과를 보여 광범위하게 쓰이는 약제이다. 하지만 혈액 수치를 떨어뜨리는 등 부작용 또한 엄청나다. 여기서 혈액수치란 방귀대장 뿡뿡이 덕에 우리 막내도 아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같은 아이들을 말한다. 환자들에게 피수치는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다. 피수치 하나에 울고 웃고.. 한편에는 걱정과 불안, 또 다른 한편에는 기대감이라는 양가 감정을 품고 매번 팔뚝을 내밀지만, 오늘은 기대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는 면역억제제를 중단하고 얼마 후 잠자기 힘들 정도의 피부 숙주(간지러움, 착색, 소양증)가 올라와 처음으로 소량의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최근까지도 이 약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피부 숙주가 가라앉을 즈음 빌어먹을 장 숙주가 생겨 또 고용량의 스테로이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량으로 먹을 땐 얼굴이 달덩이가 되었다 빠졌다 하는 등의 자잘한 부작용만 있었지만 고용량 처방 이후엔 단 며칠 만에 온몸의 근육이 빠지고 급기야 살이 7킬로나 빠지는 대참사를 겪었다. 매일 아침 보는 체중계의 바늘은 내 평생 초등학교 6학년 이후 보지 못했던 숫자를 가리켰다.
몸무게는 정상이지만 평생 하비로 살아온 내게 엉덩이, 허벅지 살이 빠진다는 건 그 어떤 다이어트를 해도 이룰 수 없는 평생 숙원이었다. 그런데 내가 납작 궁둥이가 될 수 있다니…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더욱이 단기간에 훅 빠진 살과 얼마 있지도 않았던 근육의 실종은 나를 이식 직후보다 더한 저질체력으로 만들었다. 완존 할머니 몸매..
걷다 넘어지기가 수차례, 한 번 쪼그려 앉으면 주변의 도움 없이 다시 일어서는 게 불가능했다. 아무 생각 없이 쪼그려 앉았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어 간호사를 호출해야 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그때는 나이가 많건 적건 이쁘건 못생겼 건, 살집이 좀 있고 씩씩하게 걷는 사람만 보면 입을 헤~~ 벌리고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주변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시락 싸들고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이식하면 새로 태어난 아기와 다름없다더니 정말 다시 걸음마를 떼야하는 상황이 오는구나.’
이렇게 무지막지한 암흑기를 거쳐 이제 스테로이드를 끊는 단계까지 오니 마치 큰 산을 넘은 듯 정말 기쁘다. 스테로이드는 한 번 시작하면 끊기도 어렵다. 증상이 호전됐다고 단기간에 끊으면 여러 부작용이 우려되기에 나도 시간을 두고 한 알 한 알 줄여갔다. 더불어 약을 줄일 때마다 또 어떤 부작용이 생길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예상대로 약을 줄일 때마다 자잘한 숙주들이 다시 올라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참을만한 정도의 경미한 증상만 있다. 하지만 이 약을 완전히 끊은 며칠동안은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고 몸살이 걸린 듯 온몸이 쑤시고 하루 종일 잠만 쏟아졌다. 침대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아이들은 방학을 맞아 심심하다 난리고 삼시 세끼도 챙겨줘야 하는데 참 난감했다. 그래도 밥은 챙겨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다 보니 혼자 있었으면 걸렀을 내 밥도 챙겨 먹고 그럭저럭 잘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글도 쓸 수 있으니 꽤 선방인 셈이다. 역시 시간이 약이다. 기대한 만큼은 아니지만 혈액 수치도 조금은 올랐으니 기쁘고 감사하다.
고맙고 또 지독한 너란 녀석. 금단 현상은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내가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아프고 그만 이별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따뜻한 봄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