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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돕 Apr 17. 2024

'두번째 돌'보다 더 좋은 것

히크만을 떼다

옷을 갈아입는 데 뭔가 허전했다. 1년 반 동안이나 내 가슴팍에 달려있던 세 개의 줄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다란 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내 오른쪽 가슴에는 이제 하얀색 반창고만 남았다. 그마저도 오늘 저녁이면 다 떼어낼 것이다. 얼마간은 꿰맨 흉터와 작은 멍자국만이 내게 달려 있던 히크만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엄청난 벌칙 같던 골수 검사가 끝나기 무섭게 나는 정맥과 연결된 가슴께에 줄 세 개를 다는 시술을 받았다. 의학 용어로는 히크만 카테터라고 한다. 이 줄을 통해 내 몸에 각종 약물과 혈액, 수액 등을 공급할 예정이었다. 오랜 시간 갖가지 약물 주입이 수반되는 내 치료의 특성상, 매번 얇고 여린 팔뚝에 주사관을 삽입하기란 매우 번거롭고도 위험하기에, 이 시술은 본격적인 치료에 앞서 꼭 필요한 수순이었다.


수술방으로 향하는 침대에 누워 나는 많이도 떨었다. 아이를 둘이나 낳아봤는데 이런 시술쯤이야 껌이지라는 격려의 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막상 거사를 치른 후에는 정말 괜찮은 것 같기도 했지만 두 번 다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몸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항암의 고통도 처절하지만 누군가 내 몸에 칼을 들이대는 물리적 행위 역시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처음에는 옷 입는 것부터 샤워하기, 아이를 껴안는 것까지 매사 불편한 것 투성이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시술부위를 방수테이프로 돌돌 말아 샤워하는 것도 정말 '껌'인 나날이 왔다. 하지만 남편은 이 줄만 보면 너무 무섭다고 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모르고 잡아당기면 어쩌지, 자다가 눌려 당겨지면 어쩌지 라는 상상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좀 살만하다 싶어 환자라는 사실을 잊을라 치면 이 줄의 존재를 확인하고 정신이 퍼뜩 들기도 했다.


처음 줄을 달고 집에 갈 적에는 무엇보다 아이들이 충격받지 않을까 두려웠다. 내가 입원했던 병동의 한 간호사는 5학년이던 어느 날 아빠가 갑자기 가슴에 긴 줄을 달고 와서 정말 충격받았었다는 얘기를 했다. 가슴에 기다랗게 뻗어 있는 긴 줄은 아빠가 사람이 아니고 꼭 인조인간 로봇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단다. 그녀의 요지는 나와 비슷한 병을 갖고 계시던 아버님이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 계시니 님도 희망을 가지세요 였으나 나는 우리 아이들도 그 간호사처럼 식겁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만 앞섰다.


다행히 내가 보기에도 무서운 이 기다란 줄을 아이들은 신기하게만 바라봤다. 이게 뭐에 쓰는 물건인지 줄 색깔이 왜 다른 건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빨간 면봉으로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이는 작업을 할 때면 턱 밑까지 머리를 들이밀고 유심히 관찰했다. 나는 이 줄이 아이들에게 슬픔과 공포가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에 정말 감사했다. "우와 신기하다." 한마디만 했던 큰 아이의 말속에는 슬픔과 공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래도 엄마는 얘 덕에 안 아프고 너무 편하다고 히크만을 치켜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동료 환자들이 하나둘씩 히크만과 멀어져 갈 때에도 나는 그 끈을 끈덕지게 붙잡고 있었다. 아직 피수치도 많이 낮고 수혈할 일도 잦았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입원하고 외래에서 수혈을 받을 때마다 이 줄의 존재는 내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완전 쫄보인 나는 주삿바늘 자체를 무서워하는데. 이 장치 덕에 혈관을 찾아 찌르고 아파하는 고통 없이 편하게 일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편쯤은 감수할 만했다.


그리고 지난주 신중한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드디어 히크만과의 이별을 선언하셨다. 남편은 말할 나위 없고 말도 못 하고 가슴앓이만 하던 엄마 아빠도 한시름 놓으시는 것 같았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 줄을 뗀다는 건 이제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재발의 위험에서도 벗어났다는 뜻이었으므로.


남편은 '두 번째 돌'과 같다던 이식 1년 때도 큰 감흥이 없어 보였는데 이번엔 달랐다. 히크만을 빼고 온 날 케이크에 꽃다발까지 사 들고 왔다. 일주일 뒤 실밥을 풀고 온 날에도 케이크를 사 왔다. 이제야 내가  나은 것 같다고.. 늘 굳어있던 남편의 얼굴에서 오랜만에 희망을 본 것 같아 나도 기뻤다.


히크만 제거 수술을 하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가슴 한쪽을 만져보게 된다. 가끔은 옷을 살짝 들고 눈으로 확인한다. 아직도 실감이 안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입원하고 시술하고 항암하고 또 무균실 또 무균실,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했던 지난 시간들도 마치 꿈만 같다. 어쩔 땐 몸서리쳐질 만큼 생생하다가도 또 어쩔 땐 전생의 일인 듯 생경하다.


그래도 확실한 건 난 지금 병원이 아닌 우리 집에 있고 내 옆엔 남편과 아이들이 있다. 지난 주말에는 핸드폰 화면이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봄꽃을 보러 갔다. 벚꽃은 벌써 절반은 떨어져 연두색 새순이 자라고 있었다. 매화를 닮은 복사꽃, 개나리, 철쭉, 이름 모를 봄꽃들이 여기저기 만발해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진을 찍다 보니 문득 히크만 생각이 났다. 그래도 1년이 넘도록 내 몸에 붙어 있었던 건데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보내버리다니. 어떤 이는 시술 후에 줄을 챙겨가기도 한다는데 나는 사진 한 장 남길 생각 못했다고 생각하니 아쉽고 미안했다. 엄마한테 이야기하니 속시원하지 뭐가 아쉽냐며 뒤도 돌아보지 말라 신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히크만아 그동안 고마웠어. 덕분에 편안했어. 올여름엔 네가 없으니 바닷물에도 한 번 퐁당 빠져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다시 한번 고마워.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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