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땀이 흘렀고 빛이 생겼다. 이건 조명팀의 이야기다. 처음세트장에 들어갈 때면 조명팀은 하루 이틀 정도 먼저 와서 조명을 세팅한다. 세트장의 규모마다 다르긴 하지만 하루 이상은 기본이다. 야외 현장에서는 카메라가 앵글을 잡고 세팅을 해야 하니 조명시간이 정말 짧게 주어진다. 물론 촬영 감독과 어떤 컷을 찍을지 논의를 하긴 하지만 잡힌 화면을 기준으로 조명을 확인하다 보니 슛돌기 전 가장 마지막까지 세팅하는 건 조명팀이다.
주로 광고를 하다가 처음 드라마를 하게 되었다는 조명팀 오빠 M은 정말 무해하다. 항상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일한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모른다기보다는 조명 밖에 모른다. 맨날 나에게 "지금 뭐 찍는 거야?", "이제 뭐 찍어?", "우리 얼마나 남았어?" 등 호기심천국이다. 여느 때와 같이 정신없던 어느 날 M이 내게 다정히 말했다. "너도 정말 힘들겠다. 맨날 사람들이 너한테만 물어봐서" 나는 정말 힘들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느라. "오빠... 저한테 맨날 물어보는 사람 오빠 밖에 없어요..." 절대 비아냥 대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저 조금만 놀리는 것일 뿐...
2-3년 전 다른 작품을 할 때 조명팀 J가 있었다. 그날은 비 오는 밤이었고 촬영장은 햇살 눈부신 오전이었다. 비가 오는 창 밖에서 한창 조명 세팅을 하고 나서 촬영을 시작했다. 햇살 눈부신 오전에. 촬영이 끝나기 전 잠깐 밖에 나갔었는데 J가 조명기에 우산의 씌우고 본인은 비를 후드득 맞고 있었다. 감전되기 싫었거나 조명기의 가격이 천문학적이거나 아님 둘 다였겠지만 제법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안에 촬영이 얼마나 진행 중인지 어디쯤 찍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햇살 눈부신 오전 뒤에 비를 맞으며 있었다. 물론 촬영이 끝나고 짜증을 한 바가지 냈다. "저는 밤에 낮씬 찍는 거랑 낮에 밤씬 찍는 거. 그리고 비 오는 날 조명 치는 거 젤 싫어요. 근데 오늘 그거 둘 다예요!!" 못 들은 척했다.
빛이 생기면 어딘가에는 그림자가 생긴다. 그게 배우의 실루엣일 수도 있고, 어떤 인물이나 도구의 형태를 명확하게 할 수도 있다. 빛과 동시에 생기는 그림자중 화면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조명기 아래에서 조명기를 꼭 붙잡고 있는 조명팀이다. M은 현장에서 뭘 모르거나 놓치는 게 아니라 그림자가 되는데 온전히 집중한다. 카메라가 완전히 세팅되었을 때 바로 조명을 맞춰 볼 수 있게 무아지경으로 일한다. 인이어로 조명감독님과 소통하고 모니터를 통해 부족한 부분과 더 할 부분을 찾아내며 최선을 다 한다. 비록 본인이 그림자라 잘 안보일지라도.
본 촬영이 끝나고 소품으로 쓰일 배우의 증명사진이 필요했다. 시간이 없기에 촬영장 한쪽 벽에 배우를 세워두고 핸드폰으로 촬영을 했다. 영 공간이 너무 어둡고 배우 얼굴에 그림자가 생겼다. 나는 조명팀에 조명기를 대충 빌렸고 사진을 찍기 위해 무거운 조명기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겼다. M은 본인이 해주겠다며 그 바쁜 와중에 한 줄기의 허튼 빛도 용납하지 않고 조명과 실크(빛을 부드럽게 내보내는 비닐(?))를 하나 대주었다. 오빠는 내게 말했다. "근데 이거 뭐 찍는 거야?" 정말 무해한 사람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