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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ULL Jul 25. 2024

예사로운 연출팀 새 막내 K

촬영 전 새로운 연출팀원을 뽑기로 했다. 공고글을 올린지 하루만에 이력서가 80장 넘게 왔다. 업계가 정말 불황이다. 분명 연출팀 막내를 뽑는다고 했는데 국내명문대 출신, 물리치료사, 심지어 해외유학파들까지 말도 안되는 인재들이 파일을 첨부와 메일보내기를 눌렀다. 많은 이력서 속에는 훌륭한 인재와 가여운 미래를 함께 창조해나갈 인재가 있었다. 우리와 함께할 인재는 당연히 미래를 창조해갈 인재였다. 단지 가여울 뿐.


29살의 K는 2-3개의 드라마와 단막극 이력이 있었고 적당히 씩씩하고 침착하고 제법 사회생활과 개인생활의 스위치를 켜고 끌 줄 아는 것 같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켰다 껐다는 이중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에만 매몰되지 않으면서 업무와 본인의 갭이 너무 크지 않은 것을 말한다. 즉 스위치가 뻑뻑하지 않고 살짝만 눌러도 되는 것을 말한다. 업계불황 덕분에 경력임에도 불구하고 막내로 들어와 가여운 미래를 함께 창조하게 되었다. K는 임금을 훨씬 더 많이 받아야하지만 제작사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불공정한 계약에 싸인을 했다. 제작사의 횡포라고 본다. 하지만 정말 불황이니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린 걸로 해야한다.


경력이 있는 K는 굳이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을 알아서 잘한다. 거기에다가 모두에게 공경과 사회생활을 베푼다. 급여에 맞게 대충 일했으면 좋겠다. 나는 일을 잘하는 막내도 좋지만 스캔을 뜨거나 카톡방에 올라온 내용들 확인, 회의록 작성 및 점심메뉴 고르기 할 인재가 필요했는데. 뭐랄까 K에게 시킨다기 보다는 양해를 구하고 부탁을 하고싶어진다. 돈은 제작사가 안 주는건데 내가 왜 미안한 기분이드냐. 하는 일은 비슷한데 내 월급이 더 많아서 그런건 아닐껄..


전에 촬영할 때는 ~. 전 작품에서~. 보통은~. K는 막내이지만 막내경력은 아님을 종종 드러나거나 드러낸다.

그럴 때 마다 그녀의 역할이 부당하게 느껴지기도하고 본인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물론 내 오지랖이 엄마를 닮아 그런 거겠지만. 몇일 전 K는 다신 급여로 본인의 경력을 낮추지 말아야겠다고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계급사회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이곳에서 낮은 급여에 싸인하는 것은 매월 말일에 입금되는 숫자가 조금 아쉬운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 또한 비례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그런 계약서에 싸인을 하며 나 또한 나를 그렇게 대한 것만 같아 비참한 기분이 들었었다. 물론 K는 나만큼 자기연민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세상에 나만큼 자기연민 심한 사람은 없다.)


이러한 상황은 업계의 불황이 초래한 그림이려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명예로운 퇴직자, 아침 저녁 사이에 실업자가 된 사장님 등. 경력과 경험, 전문성과 상관 없는 계약서의 싸인이 무엇을 또 비참하게 만들려나. 중년의 위기와 초년의 위기가 점점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방향에서 봐도 똑같은 구의 형태가 떠오른다. 지구가 둥글어서 그런걸까


K가 이 작품을 같이하면서 종종 억울한 기분은 들어도 비참한 기분은 단 1초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녀는 정말 일을 잘하고 예쁘고(외모가 아닌 사람 그자체) 좋은 사람이니까. 하나의 작품이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려면 전쟁이필요하다. 이 전쟁에서 K와 나 둘다 잠시 자기 자신을 잃을 순 있어도 "내가 낸데. 니 뭐 어쩔건데 18" 이라는 마인드 만큼은 절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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