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감독의 업무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촬영일정을 비롯해 모든스케쥴을 총괄하고 감독님의 연출방향을 이해하고 원활하게 구현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짜치게 말하면 말도 안되는 일정 속에서 연출감독만의 언어를 파파고처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번역 내용을 촬영현장에서 구현하는 복합적인 업무를 맡고 있다.
42세 조감독H는 굉장한 분위기 메이커다. 한숨을 크게 외치고, 테라스에 자주나가 담배를 피우고, 우리 중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만 않으면 모두를 즐겁게 할 수 있다. 그는 요즘 생각이 많다. 그 안의 대부분은 불만과 걱정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제법 무게가 나간다. H는 연출팀의 분위기 메이커이기 때문에 그의 걱정은 우리의 걱정이고 그의 불만은 우리가 해야할 더치페이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날. 드라마 속 추격씬을 위한 장소헌팅을 갔다. 언제나 그렇듯 연출감독의 마음에 딱 맞는 장소란 세상에 없다. 그치만 문제는 맞지 않는 장소를 맞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서 온다. 그치만 또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맞는말을 연출감독만 하는게 아니라 촬영감독도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기득권을 위한 촬영준비가 이미 시작됐다. 연출감독은 악귀가 씌었는지 촬영감독이 무슨 말만하면 좋다며 그렇게 하자고 한다. 그럴 때 마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마냥 캄캄한 촬영일정에 H는 감독과 점점 거리두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제작피디는 동물적인감각으로 그럴 돈이 없다는 걸 직감하고 H에게 눈빛을 보낸다. 그래서 장소헌팅 때는 꼭 선글라스를 끼는게 좋다.
퇴근 후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치익- 고기가 불판에 올라가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왜 그렇게 찍으려하냐며 H는 답답해했고 연출감독을 이해할 수 없다며 사실상 직무유기를 선언했다. 불판의 고기는 아무리 열심히 뒤집어도 금방 타들어갔다. 되는대로 버섯위에 쌓아두었다.
H는 K방송국에서 FD를 시작으로 20년동안 일을 했는데 올해 처음으로 1년이나 쉬었다. 업계에서 작품수가 많이 줄기도 했고 작업하기로한 작품의 편성이 미뤄지기도 했다. 가계경제의 고생 끝에 올해 만 29살의 제작피디가 건넨 볼펜으로 싸인을 했다. 한 때 조감독을 했던 비슷한 나이의 제작사 대표가 주는 법인카드를 받았다. H가 정말 답답해한 건 무엇이었을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무엇이었을까.
업계가 너무 빠르게 돌아간다. 오늘 신인이었던 배우가 내일은 자취를 감추고 어제까지만해도 한국을 대표하던 배우는 유투브에서 추억의 배우라는 타이틀이 달린다. 작년에 촬영이랑 편집까지 마쳤지만 벌써 촌스러워져버려서 내릴정류장을 결국 못찾은 작품도 있다. 쫓아가는 순간 이미 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속도를 이기는건 무게일지도 모르겠다. 20년의 시간을 보낸 자신의 무게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H가 분위기 메이커라서가 그런 건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