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꽃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아바나에 이어 도시 인구와 규모면에서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쿠바의 문화와 종교 그리고 경제의 중심지다. 1515년 건설되어 16세기 전반까지 식민지 쿠바의 수도였던 이 곳에서 19세기 말에 미국과 스페인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었다.
험준한 마에스트라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산티아고 데 쿠바는 평지의 아바나보다 게릴라전을 펼치기에는 좋은 지형이어서 20세기 쿠바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높이 1900m에 동서로 200km에 달하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의 깊숙한 곳에 혁명 당시 피델 카스트로의 사령부였던 <라 플라타>가 있다. 이 곳을 방문하면 당시 사령부로 사용했던 산채 안에 피델 카스트로의 침대와 책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역사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산티아고 데쿠바에서 200km 떨어진 이곳 사령부에 오기 위해서는 4시간의 차량 이동과 마지막 1시간의 산행을 해야 하는데 좁고 습한 길을 걷다 보면 게릴라의 힘든 삶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쿠바 혁명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피델 카스트로이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그는 쿠바의 최고지도자로 지냈다. 산티아고 데 쿠바 인근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학창 시절을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보냈으며 아바나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이곳에서 혁명의 도화선이 된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였다.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은 1953년에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가 당시 미국과 결탁한 바티스타 군사 정권에 항거해 일으킨 첫 번째 무장투쟁으로 습격이 실패하자 그는 붙잡혀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자신을 변호하며 장장 5시간에 걸친 긴 연설을 했는데 그때 그가 한 말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려달라.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
혁명 과정의 첫 번째 무장투쟁이라는 중요한 상징성을 띠는 몬카다 병영 습격 일을 기념하기 위해 쿠바 정부는 7월 26일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현재 몬카다 병영의 일부는 7월 26일이라는 이름의 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몬카다 병영을 방문하면 당시 총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병영 왼쪽에 위치한 박물관에는 7월 26일 습격 당시의 정황과 당시에 사용된 무기들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사진과 신문스크랩이 전시되어 있다. 쿠바 역사의 산 증인인 몬카다 병영이 있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는 소박하지만 낭만적인 광장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광장은 세스페데스 광장이다. 반란과 영웅의 도시답게 광장 이름을 쿠바 독립영웅인 세스페데스의 이름에서 가져온 광장 중앙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세스페데스는 산티아고 데 쿠바 출신으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대학을 졸업한 후 1843년에 스페인에서 혁명 운동에 참여하다 투옥당했다. 석방 후 1867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장을 운영하며 독립 비밀 결사대를 결성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를 해방하고 147명의 반군을 조직하여 제1차 쿠바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1869년 4월에 쿠바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873년 10월에 보수 세력이 다수파를 차지하는 의회와 대립하다가 실각한 그는 산에 잠복하고 있다가 스페인 군에 발견되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후부터 지금까지 쿠바의 국부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식민지 건축물의 보고라고 할 정도로 역사적이며 아름다운 건물들이 세스페데스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의 남쪽에는 파스텔톤의 하늘색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아순시온 대성당이 있다. 1522년 처음 자리를 잡았으며 1922년 완공된 대성당의 내부는 정교한 조각들로 쿠바에서 가장 화려한 실내를 자랑한다. 또한 성당 지하에는 쿠바 초대 총독이었던 벨라스케스 디에고의 무덤이 있으니 빠뜨리지 말고 감상하자.
광장 서쪽에는 쿠바의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디에고 벨라스케스 총독의 관저가 있다. 현재 1522년 초기 식민지 시대에 지은 이곳은 1970년부터 역사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광장 북쪽에는 시의회 건물이 있은데 1959년 1월 1일 저녁 이 건물의 2층 발코니에서 혁명 성공을 기념하는 카스트로의 첫 연설이 있었다.
마지막 공원 동쪽에는 쿨투라 미겔 마타모로스의 집이 있다. 이곳은 혁명 전까지 부유한 시민들의 사교 장소로 사용되었다. 마타모로스의 집 바로 옆에는 영국인 소설가 그레엄 그린이 문학적 영감을 받고자 찾았던 그란다 호텔이 있다. 호텔 카사 그란다의 뷰가 좋은 옥상 바에 오르면 대성당의 천사상과 종탑이 카리브해를 배경으로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또한 1층에 오픈된 카페에서 쿠바의 음악을 들으며 시원한 모히또 한잔과 함께 오후 한때의 휴식을 보내는 것도 잊지 못할 여행의 추억을 선사한다.
그란다 호텔의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한 뒤 혁명광장으로 이동한다. 광장에 도착하면 혁명광장 중앙에 포효하는 말 위에서 사자후를 외치는 안토니오 마세오 장군이 우리를 맞이한다.
산티아고 데 쿠바 공항 이름의 주인공이기도 한 마세오는 스페인계 백인 아버지와 도미니카 태생의 아프리카계 쿠바인 사이에서 혼혈아로 태어났다. 1868년에 세스페데스가 스페인에 대항해 제1차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스스로 참전하여 30번 이상의 부상과 500회 이상의 전투를 치르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호세 마르티가 주도했던 제2차 독립전쟁에도 참여하여 사망하지만 그의 눈부신 활약은 쿠바 독립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세스페데스와 마세오 그리고 호세 마르티 등 이 세 영웅은 20세기 독립운동가에서 영감을 준 빛나는 지도자였다. 혁명 정부의 최고 권력자 피델 카스트로는 이들이 던진 빛을 계승하여 쿠바의 독립을 이룩하였다.
혁명광장 왼편 거리에 있는 에레디아 극장의 벽면에는 밀짚모자에 턱수염이 있는 인물 형상이 보인다. 그 역시 쿠바 혁명의 영웅인 후안 알메이다로 1950년대 쿠바 혁명의 초기 사령관들 중 한 명으로 혁명 후 쿠바 공산당의 주요 간부가 되었다. 200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그는 쿠바 국가평의회의 부의장으로 쿠바 권력 서열 3위였다. 광장에 있는 형상 아래애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여기서 누구도 항복하지 않는다.
1959년 집권하여 2016년 사망할 때까지 절대 권력자였던 카스트로는 자신의 형상을 쿠바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독립영웅 세스페데스와 안토니오 마세오 그리고 호세 마르티의 형상을 쿠바 땅 곳곳에 남겼으며 자신의 동지이자 후배였던 후안 알메이다와 체 게바라의 형상 또한 전 국토에 정성 들여 세웠다.
전 세계 공산국가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영웅시하지 않았던 카스트로의 무덤은 산티아고 데쿠바의 근교인 산타이피 헤니아 공동묘지에 있다. 커다란 바위 안에 마련된 그의 묘비엔 어떤 수식어도 없다. 이는 그가 혁명을 팔아 권력을 유지했던 속물 혁명가들과 다른 진정한 혁명가였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가 아바나에서 죽음을 맞이하자 그의 운구를 실은 운구차가 쿠바 전역의 도시를 지날 때마다 그를 애도하는 국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산타이피 헤니아 공동묘지에는 피델이 존경했으며 쿠바 독립전쟁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의 무덤과 쿠반 재즈의 대부인 꼼바이 세군도의 무덤도 있다.
쿠바 음악에서 인생의 슬픔과 환희를 노래한 음유시인 이브라임 페레로가 있다면 큰 무게로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면 평생 여자와 시가 그리고 음악을 사랑한 꼼 바이 세군도가 그 반대편에 있다. 이브라임 페레로가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 베토벤이라면 꼼바이 세군도는 삶의 즐거움과 환희를 노래한 모차르트이다.
꼼바이 세군도의 대표곡 <찬찬>은 다양한 타악기가 펼쳐내는 탄력적인 아프리카 리듬 위에 매력적이며 밀도 높은 스페인풍의 선율에 맞추어 주인공 찬찬이 그의 연인인 후아니까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나는 알토세트로에서 마르카네로 가고 있네
그리고 쿠에토를 거쳐 마야리로 가고 있지.
그대를 향해 간직한 내 사랑 부정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어. 내 안에 침이 도는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네.
후아니까와 찬찬이 서로 바닷가에서 모래 장난을 할 때
그녀의 히프가 흔들리고 찬찬은 자극받아요.
나는 알토세트로에서 마르카네로 가고 있네
그리고 쿠에토를 거쳐 마야리로 가고 있지.
포장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노래한 콤파이 세군도의 무덤은 기타와 돌로 조각된 꽃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꽃의 수는 그가 산 나이만큼 101송이다. 그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