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도시
1700년대 스페인 사람들이 카리브해 해적들의 습격을 피해서 내륙지방에 만든 도시 산타클라라의 중심 광장에는 비달 공원이 있다. <비달>은 쿠바 독립전쟁 당시 이곳에서 스페인이 발포한 총을 맞고 전사한 <레온 시오 비달 이 카로> 대령의 이름이다.
정부군과 혁명군의 치열한 접전지 이기도 했던 비달 공원은 이곳에 사는 현지인이나 도시를 여행하는 외국인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비달 공원에는 비달 대령의 흉상과 더불어 산타 클라라 출신의 자선 사업가인 마르타 아브레우의 동상이 있다. 이 도시 출신의 자선 사업가인 그녀는 독립전쟁 당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그녀의 전 재산을 쿠바 독립과 나라를 위해 기부했다. 그녀의 동상 앞으로 그녀가 기부한 카트리드 극장이 보인다.
극장은 공연이 없는 날이면 입장료를 내고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데 극장의 무대와 무대 뒤편 그리고 분장실까지도 관람이 가능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특히 나무로 만들어진 무대와 객석 그리고 투박한 커튼콜은 손맛이 느껴지며 극장이 처음 생긴 1800년 말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또한 극장 천장에 펼쳐진 카밀로 살라야의 프레스코화가 압권으로 빼먹지말고 감상하자.
극장 옆으로 그리스 양식의 외관을 한 웅장한 도서관이 있으며 그 맞은편에 산타 클라라에서 가장 높은 10층 건물인 리브레 호텔이 있다. 호텔 벽면에는 혁명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당시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희뿌연 매연이 가득 찬 아바나와 달리 맑은 산타클라라의 공기를 마시며 다음 장소인 무장 열차 전시관으로 이동한다. 자동차보다 마차나 세 바퀴 자전거를 주요 대중교통을 사용하는 산타클라라의 거리를 걷다보면 마치 과거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무장열차 전시관은 야외전시관으로 혁명 당시 전복된 열차와 불도저가 보인다.
바티스타의 정부군은 점점 오르는 혁명군의 기세를 잠재우기 위해 산타클라라에 대규모 반격을 계획하고 이를 위해 병력과 무기를 열차에 실어 보낸다. 산타 클라라 바로 옆의 작은 마을인 레메디오스에 주둔하던 체 게바라는 산타클라라로 진격하여 불도저로 철로를 끊어내고 병력을 매복시킨다. 이후 끊어진 철로를 통과하던 열차는 탈선하여 전복되자 혁명군은 열차 안의 정부군을 제압하고 무기들을 손에 넣게 된다.
당시 이 사건으로 정부군은 힘없이 항복을 하고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에 무혈입성을 하게 된다. 쿠바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던 무장 열차 습격을 기념하기 위해 야외 전시관에는 당시 점복되었던 열차 5량과 불도저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열차 내부로 들어가면 당시 전투에 대한 기록과 탈취했던 무기 그리고 당시의 끊어진 철로 등을 전시해 두었다. 열차 외부에는 당시 총탄의 흔적도 볼 수 있다.
무장 열차 야외 전시관에서 조금 더 가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체 게바라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체 게바라는 왼손으로 어린아이를 안고 오른 손에는 그가 자주 물던 시가를 들고 있다. 그리고 벨트 아래쪽에는 그와 함께한 볼리비아 혁명군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는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총살될 때 함께 했던 볼리비아 혁명군들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제 산타클라라의 마지막 여행지이자 하이라이트인 체 게바라 기념관으로 이동한다.
체 게바라 기념관은 기념공원과 기념 조형물 그리고 추모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공원에 우뚝 솟은 25m의 체 게바라 동상 밑의 벽에는 쿠바의 민중들과 함께한 혁명 당시의 모습과 체 게바라의 마지막 편지 내용이 적혀있다. 쿠바 혁명 이후 체 게바라가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서 떠나면서 카스트로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내용에는 쿠바 민중에 대한 사랑과 체의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혁명 건설자로서 나의 가장 순수한 희망을 이곳에 두고 갑니다.
또 다른 하늘 아래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의 마음은 쿠바 국민 특히 당신에게 향할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를 향해 조국 아니면 죽음을
기념관 뒤로 가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볼리비아에서 체와 함께 사망한 16인의 무덤이 있다. 그들의 시신은 1997년 볼리비아의 비밀 무덤에서 회수되어 온 것으로 무덤 가운데에 1997년 10월 17일에 피델 카스트로가 불을 붙인 영원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전시관에는 체 게바라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사진과 혁명 당시 의사로서 사용했던 의료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외에 그리 사용했던 총기 와 의류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혁명 중에도 체가 읽었던 괴테의 책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추모관에는 체와 함께 혁명 전투를 치렀던 동료들의 얼굴들이 조각된 추모 벽이 있다. 추모벽 한 가운데에 체의 얼굴과 이름이 보인다.
또한 기념관 세 번째 전시실에는 체 게바라의 무덤이 있는데 그의 무덤은 볼리비아 혁명에서 그와 함께 사망한 38 명의 혁명가들의 이름이 새긴 돌조각들이 둘러싸고 있다.
체 게바라는 1928년 부유한 아르헨티나 가정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2살 무렵 폐렴에 걸려 심한 천식을 앓는다. 이후 그는 평생 동안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을 앓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럭비 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즐겼으며 발작할 때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계속 참여했다. 대학생이 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 그는 친구들과 오토바이로 남미 일주 여행을 하였다. 이때 우익 쿠데타 정부가 들어선 남미 민중의 가난과 고통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는 혁명의 꿈을 키웠다.
혁명은 꿈이 아니라 무기를 들고 싸우며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멕시코에서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입성한다. 하지만 적에게 발각되면서 81명 중 12명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속으로 숨어 지내면서도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상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천식을 가지고 있던 체 게바라는 산속의 모기와 뱀 그리고 늪지대라는 혹독한 환경에서 5년의 게릴라 생활을 이어갔다.
물론 게릴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비행기와 막강한 화력을 지닌 정부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견뎌야 했으며 부하들로부터 배신으로 인하여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가. 또한 전력을 다하여 훈련을 시킨 농민군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도망을 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백대일이라는 절대적인 열세지만 그는 산속에서 게릴라로 버티면서 국가와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문과 방송으로 꾸준히 알려냈다. 그 결과 쿠바 민중들의 마음은 점점 혁명군으로 가울어갔며 마침내 그들의 엄청난 지원과 참여로 정부군을 항복시키고 혁명을 성공시킨다.
그는 혁명 이후 산업부 장관을 하면서도 늘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며 혁명정신을 잃지않기 위해 일하였다. 1965년 국립중앙은행장으로 일하던 그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1965년 콩고로 떠난다. 그리고 다음 해에 볼리비아에서 혁명 전쟁을 치루던 그는 미국의 CIA와 볼리비아 정부 연합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볼리비아 정부는 그는 죽음이 대한 증거로 그의 두 손만을 쿠바로 보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97년이 되자 그의 나머지 유해와 볼리비아에서 죽은 동지들의 시신이 쿠바로 반환되어 지금 이곳 산타클라라 기념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