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을 깨우지 마라.
쿠바의 남쪽 해안가에 자리잡은 트리니다드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볼거리가 넘치고 도시 전체가 아름답다. 붉은 기와로 덮힌 트리니다드는 멀리 펼쳐진 카리브해 바다와 푸른 산을 배경으로 완벽한 절경을 자랑한다.
도시의 중앙에 자리잡은 마요르 광장은 트리니다드의 중심 광장으로 광장을 둘러싼 파스텔톤의 집들과 가게 그리고 식당들로 인해 언제나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저녁이면 광장 옆 대 계단에 설치된 무대에서 매일 쿠반 재즈 페스티발이 열려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1524년 쿠바를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이 대규모 사탕수수 농사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과 함께 트리나다드에 정착하였다. 트리니다드는 스페인말로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으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는 교리를 의미한다. 그 거룩한 말이 도시의 지명이 된 이곳에 식민지 수탈의 상징인 사탕수수 제분소가 7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광장 주변에는 당시 대지주와 공장주들의 궁전같은 대저택들이 늘어서 있으며 광장을 벗어나면 수탈당하던 노예들이 사는 조그만 집들이 둘러싸고 있다.
마요르 광장 바로 옆에는 트라이다드 대성당이 있다. 스페인식 양식의 성당은 1892년 폭풍으로 인하여 무너진 옛 성당터에 새로 건립한 성당으로 천장이 높으며 목재로 장식한 화려한 제단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특히 두번째 채플에 1713년에 제작된 십자가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트리니다드 성당을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LCB 박물관이 나온다. 옛날 스페인 대지주가 살았던 이 곳을 칸테로의 집이라 부른다. 독일계 이민자인 칸테로는 스페인계 농장주이자 노예무역업자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고 그의 부인과 결혼하여 이 집과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유럽 스타일로 장식된 주택안 전시실에는 혁명 이후 반 혁명 세력과 치루었던 치열한 전투에 대한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종탑처럼 생긴 트리니다드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좁은 계단을 지나 나무로 된 사다리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서면 트리니다드의 전경이 펼쳐진다. 붉은 기와의 집들과 푸른 산 그리고 저 멀리 카리브의 바다가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가까운 골목길로 들어서면 사가를 파는 가게와 식당 그리고 빨래가 늘어진 집들이 보인다. 집 앞에는 노인들이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거나 두 세명의 사람들이 여기 저기 모여서 잡담을 나누는 등 정겹고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식당마다 대여섯명의 악단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흘러나와 거리는 항상 활기에 차있다.
골목 골목을 헤메다가 골목 끝에 있는 로맨틱 박물관을 방문하면 스페인의 대부호가 사용했던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장삭품 그리고 생활용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1층 중앙에 가난한 현지 화가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전시 판매하고 있어 오묘한 감정이 든다.
로만틱 박물관에서 5분 거리에 건축박물관이 있다. 트리니다드에서 가장 볼만한 박물관인 이곳은 1783년 사탕수수 농장 주인의 대 저택을 개조하여 당시 생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1890년에 사용한 가스등과 온 몸으로 물을 뿜는 샤워기가 여행자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트리니다드 도심 여행의 마지막은 현지인들의 생활 중심지인 세스페데스 광장이다. 광장은 시청과 의회 그리고 은행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광장 한쪽 벽면에는 벽화로 채워져 있다. 세스페데스 광장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그 이유는 이곳 광장 한 구석에 와이파이 공유기가 있어 이곳에 와야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트리니다드는 근교 여행의 최고 추천지인 잉헤니오스 농장을 방문한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사탕수수 재배지로 유명했던 이곳을 가려면 증기기관차를 이용해야 한다. 유리창이 없는 오랜된 1975년 러시아 증기 기관차를 타고 푸른 밀림 속을 덜컹거리며 3시간을 달리면 사탕수수 농장인 잉헤니오스 농장이 나온다. 농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노예 감시탑으로 그 높이가 45m에 달한다. 높은 감시탑이 있어야 할 정도로 농장은 넓어서 그 크기로 여행자를 압도한다.
당시 부유한 농장의 저택을 둘러보고 저택 아래에 있는 가난한 노예들의 초라한 집들의 모습을 관람하다보면 노예로 팔려와 이 넓은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였던 사람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마을 곳곳에는 레이스와 옥수수 그리고 망고를 파는 노점상들이 보이는데 순박한 상인들의 미소가 정겹다.
트리니다드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순수한 대자연과 그 속에서 끊이지 않는 음악에 있다.
루프트 탑 식당에 앉아 밴드의 음악과 함께 저렴하면서 맛있는 랍스터를 먹고 있으면 노을이 지기 시작하며 지상 최고의 쇼를 연출한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맑고 웅장한 하늘아래 형형색색의 노을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행자의 탄성을 자아낸다. 넋을 잃은 여행자는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그 황홀함에 취한다.
하지만 트리니다드의 진짜 매력은 완전히 어둠이 내린 밤이 되어서야 그 진가가 드러난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사라지고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과 함께 트리니다드에 어둠이 내리면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풀 열쇠인 모히토와 시가를 쥐고 마요르 광장의 계단을 오른다.
마요르 광장의 무대는 이미 무희들의 살사와 함께 경쾌한 소울 리듬으로 무장한 가수가 인생의 즐거움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가수들의 춤과 음악은 프로수준이다. 아프리카 특유의 빠른 템포가 스페인의 우아함과 만나 처음에는 부드럽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뜨겁게 사람들의 영혼을 달군다.
꽃들은 그대 곁에 남아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때 그 말을 믿으세요. 하지만 어느 저녁 꽃들이 시들어버린다면 그대가 나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 꽃들이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추억을 노래하는 아련한 <도스 그라데니아스>가 끝나자 무대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칸델라>가 연주된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일어나서 춤을 춘다.
불났어요. 소방차를 불러주세요. 하지만 소용 없어요. 내 마음에 불이 났어요. 불났어요 소방차를 불러주세요. 하지만 소용 없어요. 내 마음에 불이 났어요. 여기도 불이 나고 저기도 불이 났어요.
신나게 춤을 추고 있지만 그들은 안다.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현실에서 자신의 자존심과 영혼을 팔아야만 남들만큼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고 물어서는 안된다. 남들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순수한 사랑은 없다. 오직 지친 영혼이 버틸 수 있는 시가와 럼 그리고 음악이 필요할 뿐이다.
계속된 무대에 사람들이 무아지경으로 빠져들 때쯤 피날레 공연이 시작한다. 애잔한 기타와 트럼펫에 맞추어 <침묵>이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조용히 계단에 앉아 럼을 홀짝거리며 고단하고 힘들었던 지난 날들을 떠올린다.
내 들판에는 꽃들이 잠들어있네. 글라디올라스와 흰 백합 그리고 슬픔에 잠긴 내 영혼.
난 꽃들에게 내 아픔을 숨기고 싶네. 인생의 괴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아. 내 슬픔을 알면 꽃들도 울테니까.
깨우지마라. 모두 잠들었네. 글라디올라스와 흰 백합.
인생의 괴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아. 내 슬픔을 알면 꽃들도 울테니까. 깨우지마라. 모두 잠들었네. 글라디올라스와 흰 백합. 내 슬픔을 꽃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내 눈물을 보면 꽃들은 죽어버릴테니까.
가수는 덤덤히 노래한다. 당신들 뿐 아니라 우리도 아픈 삶을 살아왔다고. 그러나 그 아픔과 슬픔을 삼키지 않으면 세상의 꽃들이 죽어버린다고 노래한다. 그렇게 버텨온 삶이 모여서 결국 아름다워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노래한다. 결국 세월이 지나야 장밋빛 인생이 완성된다고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