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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Nov 09. 2020

산티아고

칠레의 수도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황금을 찾아 남미로 온 스페인의 침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에 의해 1541년에 건설돠었다. 스페인의 수호성인이자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성인의 이름을 가져온 산티아고는 남미 대륙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자 브라질의 상파울루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함께 남미의 3대 경제 중심지 중 하나이다.


산티아고 여행의 시작은 야자수와 유칼립투스로 울창한 중세 유럽풍의 아르마스 광장부터이다.



산티아고의 중심지인 센트로에 자리 잡고 있는 아르마스 광장은 1541년 산티아고가 조성된 후부터 지금까지 산티아고를 대표하는 광장으로 산티아고 대성당과 대통령궁 그리고 시청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광장에는 산티아고를 건설한 스페인의 정복자이자 총독인 발디비아의 기마상과 그 침략자에 맞서 싸웠던 민족 지도자의 동상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으며 그 안에 수많은 시민과 여행객이 뒤섞여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아르마스 광장의 서쪽에 자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산티아고 대성당은 발디비아가 산티아고를 건설한 1541년 에 건설을 시작하여 1558년 완공되었다. 하지만 잦은 지진과 화재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에도 개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한  실내 공간에 대형 파이프 오르간과 다양한 성물 그리고 종교화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지하에는 역사적 주요 인물들이 안치되어 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콜로니얼풍의 큰 궁전인 모네다가 나온다. 모네다는 스페인어로 <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곳은 원래 조폐청 건물로 사용하다가 1846년부터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모네다 궁전 뒤에는 아옌데 칠레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다. 1973년 9월 중남미에 사회주의 정권이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미국의 지지를 받는 피노체트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아옌데 대통령은 이곳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마지막으로 라디오 연설을 한 뒤 총으로 자살하였다.


조국이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자기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내팽개친 세력과 약속을 저버린 세력 그리고 군의 원칙을 깨뜨린 세력에게 남은 건 치욕뿐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절대 가벼이 움직이면 안 됩니다. 학살은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소중한 가치는 지켜야 합니다. 존엄하며 보다 나은 삶을 여러분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권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의 사후 세계에서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합법적으로 설립된 사회주의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킨 피노체트는 17년간 군부독재 정치를 이어갔다.


아르마스 광장 근처에는 해산물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중앙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산티아고 중앙시장에서는 다양한 칠레식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 그중 키조개와 홍합 그리고 새우 등 해산물을 듬뿍 넣어 끊인 해산물 뚝배기 음식인 마리스코스 (Palla Mariscos)는 비린맛이 없어 많은 여행자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면 중앙에 자리한 관광객 식당보다 가급적 외곽의 작고 허름한 식당을 추천한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산책 겸 휴식을 위하여 산타루시아 언덕으로 이동하자.



산타루시아 언덕은 한때는 은신처와 수녀원 그리고 군용 요새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1875년부터는 시민들의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언덕의 제일 높은 꼭대기에 오르면 멋진 시내의 전망을 볼 수 있다.


산타 루시아 언덕이 시내 중심가의 나지막한 언덕이라면 산 크리스토발 언덕은 870m 높이의 언덕이다. 카우폴리칸 광장으로 가면 언덕 꼭대기까지 가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언덕 정상에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1918년 프랑스 정부가 선물한 높이 18m에 이르는 성모 마리아 상과 메트로폴리탄 공원이 자리잡고 있어 많은 여행자와 현지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네루다의 집인 <라 챠스코나>가 나온다.



네루다가 직접 설계한 집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영상 룸이 나와 네루다의 일대기를 5분간 보여준다. 영상을 관람한 후 집안으로 들어가면 책이 가득한 서재와 침실 그리고 형형색색의 와인 잔과 접시 등이 높여 있는 식당이 나타난다. 특히 목각 조각상과 조개껍질 등 희귀한 수집품이 집안 곳곳에 전시되어 있어 시인의 독특한 삶과 로맨틱한 시적 영감을 엿볼 수 있다.


1904년 7월 12일 칠레에서 태어난 네루다는 1921년에 〈축제의 노래〉 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초기 대표작으로서 1924년에 발표한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사에서 네루다의 순수함과 고독 그리고 절망을 읽을 수 있다.


시가 나를 찾아왔어.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이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건드리더군.


1934년 스페인 주재 칠레 영사가 되었으나 당시 스페인은 내전이 일어났으며 내전 기간 중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로르카가 의문의 죽음을 맞으며 네루다는 파시즘에 대한 분노로 열혈 공산주의자로 변신한다. 이후 네루다의 시는 민중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1945년 귀국 한 네루다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며  칠레 북부의 탄광지대에서 칠레 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네루다는 칠레 좌파진영의 지지를 받던 가브리엘 비델라 후보의 선전 책임자로 일하지만 비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의 압력에 의해 자신을 지지한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이에 네루다가 대통령의 배신을 폭로하자 비델라는 의원직을 박탈하였다. 이후 네루다는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탈출한 그는 프랑스와 멕시코 그리고 이탈리아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한다.


오 칠레여
바다와 포도주와 눈으로 덮인 길고 가늘한 꽃잎이여.
아 언제 다시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1953년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온 네루다는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 정착해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칠레에서 좌파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1969년 네루다는 칠레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에 지명됐지만 입후보를 철회하고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로의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1970년 칠레에서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그리고 그는 아옌데 인민연합 정권에서 주 프랑스 대사가 되었으며 1971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아옌데의 급진적 정치실험은 각계로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이슬라네그라에서 조용히 만년을 보내던 네루다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피노체트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에서 항전하던 친구 아옌데 대통령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진 네루다의 병세가 걷잡을 수없이 악화되어 1973년 9월 23일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기 며칠 전 침대에 누운 채로 부인 마틸다에게 쿠데타를 규탄하는 글을 구술하고 있는 도중 무장군인들이 가택수색을 위해 들이닥쳤다. 네루다는 몸을 일으키며 장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둘러보게나.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은 여기 하나밖에 없네.
그것은 바로 시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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