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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15. 2020

구엘공원

자연에서 놀고 배우다.

1852년 6월 25일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가우디는 가난한 대장장이의 다섯 번째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약하게 태어난 가우디의 어머니는 가우디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약한 몸으로나마 살아있다는 건
분명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다는 것
그 뜻을 이루려면 병마와 싸워 이겨야 한단다.


그가 나고 자란 카탈루냐 지방의 가장 높은 산인 몬세라트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갈 수는 없었지만 높이 솟은 산들의 다양한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는 놀았다. 가우디에게 자연은 놀이터이자 교과서였다. 이후 그는 자연을 닮은 곡선을 많이 사용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그에게 건축가로서의 남다른 재능을 물려준 건 바로 대장장이인 아버지였다. 가우디는 어릴 적부터 시간만 나면 아버지의 대장간에 앉아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성장하여 과거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의 공간 인지능력이 남다른 이유는 내가 솥 전문 대장장이의 아들이자, 손자이자, 증손자이기 때문이다.
선조는 모두 공간감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 특히 카탈루냐 지방은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넘어가는 산업혁명 시대였다. 그 시대를 살았던 수공업자이자 대장장이었던 아버지는 대장간을 팔아야 했으며 그 돈으로 가우디의 학비를 대었다.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1868년 가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던 형 프란시스코와 함께 살았다. 1873년 건축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 때문에 교수들의 미움을 사기 일수였다.


그러던 중 1876년 형이 2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두 달 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슬픔에 잠긴 가우디에게 그의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학업을 마치라고 말을 한다. 이후 가우디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공부에 몰두한다. 하지만 가우디는 건축학교를 꼴찌로 졸업한다.


이상적이며 합리적인 신고전주의 건축에 머물러 있던 교수들은 감성적으로 자연을 재현하는 가우디의  건축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졸업 당시 학장이 한 말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학위를 수여받은 사람이 미친 녀석인지
아니면 천재인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시대의 그늘  


학교를 졸업한 가우디는 회사를 차려 사회로 나갔다.

1879년 바르셀로나 정부가 레알 광장을 조성하고 그에 어울리는 가로등 공모전을 개최했다. 여기에 응모한 가우디는 대상을 받으며 가로등 사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가우디가 요청한 예산의 10퍼센트밖에 주지 않아 가우디는 2개의 가로등만 만들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가로등에는 6개의 조명이 달렸으며 당시 스페인을 상징하는 상업의 신인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투구와 철로 만든 뱀이 장식되어 있다. 그 아래로 <성 조지>의 십자가와 카탈루냐를 상징하는 휘장을 달려 있다.


가우디가 활동했던 19세기 후반 바르셀로나는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로 부르주아는 승승장구했지만 그 이면에 소외되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가정을 돌볼 틈 없이 바빴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본 신학 서적상 보카베아는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동네에 예수의 어머니와 아버지인 마리아와 요셉이 중심이 되는 <성 가족 성당>을 짓기로 한다.


당시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에 대한 조명이 가톨릭에서 처음으로 조명되던 때였다. 요셉은 자신의 혈육이 아닌 어린 예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집트로 피난하였으며 이후 늘 예수를 돌보았다. 그래서 가정이 파괴되는 산업화 시대에 새로운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보카베아는 기부금을 모으고 성당 건축 위원회를 조직하여 1882년 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지만 성당 건축이 순조롭지 않자 책임자를 바꾸게 되었다. 그 책임자가 31세의 가우디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가우디는 처음부터 자신의 생애에 성당을 완공할 마음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성당을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지었으며 몇 백 년이 지나 완성되기를 바랐다. 그는 성당이 인간을 구원할 신의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젊은 가우디는 먹고살아야 했다. 기부로 이루어졌던 성당 건축비에 자신의 수고비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가우디의 후원자 구엘


1878년 어느 날, 가우디에게 파리 만국박람회에 쓰일 장갑 진열대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가우디가 설계한 진열대는 파리로 실려 갔고, 거기서 진열대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은 구엘은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가우디를 찾았다. 남다른 안목을 가진 구엘은 가우디의 진가를 바로 알아보았으며 그 이후로 평생 후원자가 되었다. 구엘이 의뢰한 첫 번째 작품이 구엘 저택이었다.



1886년부터 3년에 걸쳐 지어진 구엘 저택은 람블라스 거리 중간에 있다. 가우디는 높은 돔 천장에 구멍을 뚫어 자연채광을 끌어들이고 깨진 타일로 다양한 모양의 굴뚝을 장식하였다.


구엘저택에서  가우디 특유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최고 볼거리는 문에 장식된 철제 조형물이다.


마차가 들어갔다가 나오는 커다란 두 개의 문 사이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의 철제 조형물은 대장장이 아버지의 영향으로 받은 가우디의 철 세공 능력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끊어지지 않은 철제 장식물이 종이 휘듯 섬세하게 연결되며 문을 장식하고 있다.


구엘 공원


1890년 영국의 전원도시를 다녀온 구엘은 바르셀로나 외곽에 전원주택단지를 조성하는 계획을 세워 가우디에게 맡긴다. 가우디는 이 공사에 전념하기 위해 구엘 공원에 자신의 집을 먼저 짓고 이사를 와서 일에 집중한다. 하지만 14년에 걸쳐 진행된 주택단지 조성은 구엘의 파산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당시 가우디가 진행한 작업의 성과물로는 세상에서 가장 긴 테라스를 가진 광장과 그 아래 콜로네이드 홀 그리고 동화 속 집 두 채만 남아 있다. 1894년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곳은 가우디의 과학적인 설계와 아름다운 장식으로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고 있다.



색감을 중요시하며 색깔은 형태를 살아 숨 쉬게 한다고 믿는 그는 화려한 세라믹으로 광장의 테라스를 장식하였다. 그 결과 지중해가 보이는 광장의 테라스는 그 색감을 통해 강렬한 생명력이 넘친다..


광장 아래, 시장으로 조성된 콜로네이드 홀은 86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홀 천장에는 화려한 색상의 유리와 타일로 계절에 따라 따라 변하는 해와 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콜로네이드 홀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바깥쪽 기둥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울퉁불퉁한 천장을 떠받히는 기둥으로 가장 안정적인 형태로 건축되었다. 예를 들어 급경사에 내려오는 차를 멈추기 위해서 앞에서 차를 막는다면 우리 몸이 기울어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콜로네이드 홀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중요한 비밀이 담겨 있다. 바르셀로나는 강우량이 많지 않아 시민들은 물 부족으로 항상 불편함을 겪었다. 이러한 부분을 해소하려는 가우디는 광장에 비가 내리면 광장에서 받아진 빗물이 여러 겹 쌓은 광장 위 자갈과 모래로 스며들게 하였다.


그리고 광장에서 걸러진 물은 광장 아래의 콜로네이드 홀 천장의 웅덩이에 고이도록 했다. 그리고 고인 물은 거대한 기둥 속 관을 통해 지하로 흐르게 한 뒤, 계단에 있는 분수를 통해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계단에 있는 분수는 구엘 공원의 상징으로 도마뱀과 카멜레온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수를 지키는 거대한 뱀 피톤을 상징하는 도마뱀은 현재 많은 여행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분수를 따라 입구로 내려오면 동화 속 과자 집처럼 생긴 두 채의 건물이 있다. 가우디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탄생한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집은 경비실과 세탁소 용도로 건설되었다. 경비실과 세탁소가 이 정도로 아름다운데 정말 주택단지를 건설했다면 과연 그 집들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이 안될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


광장 옆으로 가면  구엘 공원에서 가장 자연의 모습을 잘 드러낸 야자나무 모양의 기둥이 늘어서 있다. 돌로 만든 기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 구엘 공원을 만끽할 수 있다.



구엘 공원 공사가 수포로 돌아가고 이어서 카사 바트요와 카사 밀라를 지은 가우디는 밀라와 법정 다툼에 휩싸이고 유일한 혈육이자 사랑하는 조카마저 잃어버리자 성가족 성당의 공사에 몰입한다.


하지만 심적으로 약해진 가우디는 1910년 브루셀라 병에 걸려 요양을 떠난다. 그는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하며 사람들이 대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변했다. 아파서 몸 져 누운 와중에 그에게 위로를 주었던 것은 그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신이 그렇게 힘들게 너를 세상에 나오게  것은 
네가 분명 특별히  일이 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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