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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17. 2020

프라도 미술관 2

화가들이 뽑은 최고의 화가

스페인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인물이 벨라스케스이다. 그는 빛과 색이라는 바로크 회화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방법 자체를 혁신한 화가이다.


그는 18세기 고야를 비롯하여 19세기 마네와 인상파 화가 그리고 20세기 피카소와 달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는 오늘날 화가들이 뽑은 역사상 최고의 화가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린 위대한 화가이다. 그의 명성을 드 높인 작품이 <시녀들>이다.



시녀들


마드리드 왕궁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어 있다가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진 이 작품은 처음에는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불리었으나 그 후 <벨라스케스 자신의 초상화> <펠리페 4세의 가족> 등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1843년이 되어서야 현재의 이름인 <시녀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석이 분분한 작품이다.


작품에서 제일 왼쪽에 당시 궁정화가였던 이젤 앞의 벨라스케스가 보인다. 그의 가슴에는 순수 혈통의 귀족들만 가입할 수 있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보인다. 밸라스케스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3년 후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아 기사단 제복을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표식은 후에 덧칠한 것으로 평생 귀족이 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벨라스케스 옆으로 시녀 한 명과 마르가리타 공주가 보인다. 시녀의 모습에서 마르가리타 공주에 대한 다정하고 친밀한 모습이 느껴진다.


공주 오른쪽으로 다른 시녀 한 명과 두 명의 난쟁이가 보이는데  난쟁이는 공주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고용되었다. 그 뒤로 서 있는 두 사람은 왕비의 시녀와 수행원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보이는 거울 속에는 국왕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가 보이며 거울 옆으로 문이 열려 있는데 문 사이로 계단에 서 있는 사람은 왕비의 시종이다.



거울과 열린 문을 통해 공간을 넓게 확장시키는 방식은 벨라스케스가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작품에서 거울 안에 반사된 국왕 부부는 그림의 모델로 서 있고 공주가 그곳을 방문해 부모님 앞으로 가려고 하자 시녀가 공주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붉은 테라코타 병으로 만든 향수를 건네고 있다.


따스한 궁중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에서 화가는 국왕 부부를 그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공주와 시녀들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화가는 국왕 부부를 그리고 있는데 작품에는 국왕 부부 맞은편에 있는 공주와 시녀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관람객인 우리는 국왕 부부의 자리에 서서 어느덧 작품 안으로  들어가 내가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인지 작품 속 인물들이 나를 보고 있는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어느덧 우리는 생생한 궁중의 일상에 참여하고 있다. 보는 곳에 대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보고 클림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 세상에 화가는 2명만 있다.
벨라스케스와 나이다.



바쿠스와 주정뱅이들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경건한 분위기의 고전 회화와는 달리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에서 직설적이면서 사실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선보이고 있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마치 평범한 농부들이 모여 포도주의 신 바쿠스를 흉내 내는 젊은 배우와 함께 장난을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 술의 신 바쿠스를 하층민의 친구로 그린 이 작품에서 화면의 색감 역시 아름답고 이상적인 색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아랫부분에 보이는 테라코타 술병과 유리병의 질감은 너무나 생생하다.


평범한 농부들의 웃음에 인간적인 존엄성이 묻어나고 있는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초기 대표작으로 그가 루벤스와 함께 이태리를 여행하면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이 주장한 대로라면 우리의 일상 속에 신이 존재할 것이니 이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야의 작품을 감상할 차례이다.


벨라스케스를 이어 궁중화가가 된 고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다. 그는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경향의 스페인 화풍에서 벗어나 과감하고 자유로운 색감으로 자신의 감정을 화폭에 담았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청각을 잃고 갖은 전쟁을 겪으면서 파괴적이고 대담한 붓 터치로 후세의 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마네와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마하> 시리즈가 있다.



옷을 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


고야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직접 만나보면 모든 작품들이 반짝거리며 관람객을 유혹한다. 그중 가장 반짝이며 빛나는 작품이 <마하>이다.


고야가 활동할 당시 스페인은 강력한 가톨릭 국가로 여성의 누드화를 그리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화가들은 여성의 누드화를 그리되 그 위로 천사를 그려 넣어 신화 속 여신의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고야는 신화적 요소 없이 사실적으로 여인의 누드를 그렸다.


1800년에 <옷을 벗은 마하>가 공개되자 당연히 신성 모독 논란을 일으켰고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것을 거절하고 대신 1803년 <옷 입은 마하>를 새로 그려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두 작품은 어떠한 비유나 신화적 연관성이 없는 현실의 여인으로 <서양 예술 최초의 여성 누드>로 평가받았다.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그림을 소유하게 된 카를로스 4세의 수상 고도이의 정부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고야는 이를 부정했다.


작품 속 여인은 관능적인 모습으로 당당하게 관람자를 쳐다보고 있다. 자세는 두 팔을 든 채 도발적인 표정의 여인 위로 쏟아지는 빛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하지만 실제 여성이 자신의 몸을 드러낸 채 오만하고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섹시한 분위기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자각한 근대의 여성상이 느껴진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궁중 화가였던 고야는 이 작품 한가운데에 왕이 아닌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를 배치해 그녀가 실질적인 통치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손을 잡고 있는 왕비는 늙고 목이 두껍게 그려져 있다.


왕비 오른쪽으로 국왕은 매부리코에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다. 국왕의 뒤에 왕의 남동생이  살짝 보이며 그 옆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공주 부부가 있다.


한편 화면 왼편 제일 앞쪽에는 훗날 페르난도 7세가 되는 페르디난트 왕자가 보이고 그 뒤에는 왕의 여동생인 마리아 호세파 공주가 서 있다. 얼굴을 뒤로 돌린 여성은 장차 왕세자비가 될 나폴리 여왕의 딸이다. 고야는 그녀가 스페인으로 온 후 옆으로 돌린 얼굴을 앞으로 돌려 다시 그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고야는 이 작품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의식적으로 모방해 그림 왼쪽 구석에 대형 캔버스를 앞에 두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집어넣었다.


이 작품은 이전까지의 궁정 초상화와는 달리 인물들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은 그들의 어깨에 스페인 왕실의 훈장인 청색과 백색으로 된 장식 띠를 두르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왕족다운 위엄과 기상을 찾을 수 없다.


보통 궁정에 속한 화가가 왕가의 초상을 그릴 때에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그리지만 고야는 오히려 왕의 타락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본 왕실의 가족들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그들은 자신들의 초상이 풍자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고야는 왕실 가족과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그의 얼굴은 그들로부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와 어두운 그림자에 반쯤 잠겨 있다. 그러면서 그는 황금과 영광이 지배하는 화려한 무대에서 옆으로 비켜나 냉정하게 권력의 허상을 바라보고 있다.


고야는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외양을 통해 인물의 개성과 내면을 보여주면서도 깊은 통찰력으로 허영으로 가득 찬 왕족의 무능함을 표현하고  있다.



1808년 5월 3일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 그려진지 8년 후 왕자 페르난도가 자신의 부모를 몰아내고 1808년 3월에 즉위한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왕위를 나폴레옹의 형에게 양위한다.


이에 분개한 민중들은 1808년 5월 3일 도시로 나와 항거를 하지만 5천 명의 민중들이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무차별 살해당한다.


작품을 살펴보면 땅에는 피에 젖은 시체 세 구가 뒹굴고 있으며 하얀 옷을 입은 수도사가 예수처럼 양 팔을 들고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옆으로는 또 다른 사형수들이 줄을 이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고야는 전쟁의 숭고함이나 영웅적인 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것처럼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캄캄한 어둠이 깔린 하늘 저편으로 교회가 보이지만 불이 꺼져 어떠한 희망도 없음을 상징한다. 사격수 앞에 놓인 등불로부터 빛이 나오지만 그 앞으로 비친 시체들의 피가 더욱 공포감을 안겨주고 있다. 인간의 야만적인 행동과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후에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영향을 주었다.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고야는 1819년 마드리드 교외에 있는 시골집에서 14점의 대형 벽화를 그렸는데 대부분 어둡고 기괴한 작품들이었다.  그중 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인  <아들을 먹는 사투르누스>이다. 거의 80세를 앞두고 있었고 청력을 잃는 등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이 작품은 세상과 단절한 채 병마와 싸우고 있었던 고야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고야는 왕족이나 귀족 등의 주문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와 영감에 의해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이는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이후 고야는 현대 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 속 <사투르누스>는 고대 로마의 농경신으로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차례로 잡아먹은 신이다. 고야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성의 타락과 전쟁의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부릅뜬 두 눈은 광기를 내뿜으며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 놀라고 있는 것 같다.





지구 최후의 생존자인 개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 종말의 공포를 처절하게 느끼고 있다. 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저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고야는 작품 속 개와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면  언제든 종말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생로병사의 인간 삶에서 나의 삶의 행복과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자신에게 분명하게 물어보지 않으면 최후에 우리는 이 작품 속 개와 같이 절망적인 공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고 온 감정을 담아서 표현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하면서 스페인을 대표하는 네 명의 화가들로부터  자신들이 생각하는 삶의 관점을 보았다. 삶을 천국과 지옥으로 가기 위한 여정으로 생각하며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보쉬가 있었는가 하면 삶은 늘 성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엘 그레코도 있었다.


또한 풍자적이고 유쾌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벨라스케스가 있었는가 하면 외롭고 아픈 세상에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고야도 있었다.


이 중 나와 가까운 화가는 누구인지 생각하면서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한다면 그 어떤 시간보다도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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