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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12. 2020

콜럼버스

세비야의 희망

제노바의 가난한 직조공 집안에서 태어나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콜럼버스는 아버지를 도와 직조공 일을 하다가 선원이 되어 지중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1476년 선원으로 일하며 포르투갈에 리스본에 입국한 그는 정착해 있던 동생과 함께 서적과 지도를 판매하는 일을 하며 펠리파 모니즈 페레 스텔로와 결혼한다. 그의 신부는 당시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 사업을 관리하던 집안 출신이었다. 콜럼버스는 장인의 배려로 지중해 각지와 북대서양의 섬을 오가며 설탕 매매사업을 하면서 선원과 상인으로 상당한 지위에 올랐다.   

  

야심에 찬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시아 항해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럽 각국은 후추 도자기 비단 같은 아시아 물건을 유럽에 가져오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당시 중동지역을 통일한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육로가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1484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였으나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로 가는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은 거절하였다. 낙심한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갔다.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있었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며 국력을 키우려고 준비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바다 길로 인도에 도착한다는 그의 계획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은 사실이지만 인도까지 거리가 너무 가까이 설계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이 있다는 사실을 유럽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또한 새로 발견된 땅에서 총독의 지위를 줄 것과 총수익의 10분의 1을 달라는 콜럼버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어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콜럼버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경쟁 국가였던 포르투갈의 해외 확장 사업이 점차 성과를 얻자 이를 참지 못한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고 선박 2척을 내주었으며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다. 콜럼버스는 총 4차례나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다.



제1 항해 시대에 아메리카에 상륙한 그는 여러 가지 금제품을 가져오면서 성과를 보이자 왕 부부는 그를 약속대로 신대륙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다음 해인 1493년 배 17척에다 1,200명의 대 선단을 이끌고 제2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서 금의 산출량이 기대 이하로 작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인디언을 학대하고 살육하였으며 노예화하였다. 두 번째 항해에서 스페인으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비난여론으로 문책당하였다.


1498년에 재개한 제3회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는 신대륙에서 내부 반란이 일어나자 그의 통치력이 무능하다고 판단한 본국의 송환으로 세 번째 항해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후 신세계에 대한 기대가 계속 떨어진다는 본국의 여론을 만회하기 위해 네 번째 항해를 하였으나 역시 별 성과 없이 에스파냐로 귀국했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항해였다.


귀국한 콜럼버스는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였으며 좌절감 속에 지냈다. 이후 콜럼버스는 자신이 정당하게 누려야 하는 직위와 하사금을 달라는 청원을 끊임없이 올렸지만 거절당하자 그는 자신의 시신만이라도 아메리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에 따라 처음에는 아메리카에 시신을 안장하였으나 식민지 시대가 끝나면서 그의 시신은 스페인으로 돌아와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시켰다. 스페인의 땅에 묻지 말라는 그의 유언대로 땅이 아닌 공중에 그의 시신을 안장시켰다.


오늘날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그가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점과 그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의 수백만 명의 원주민이 노예화되고 살해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항해시대로 유럽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선구자로서 콜럼버스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그의 이름을 딴 도시만도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전 세계에 수백 곳을 헤아린다. 콜럼버스의 위상을 받드는 세계 곳곳의 도시들 중 고향도 아닌 그의 묘가 세비야에 있는 이유는 그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은을 비롯한 수많은 자원이 유입되면서 16세기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데 신대륙의 물자가 쏟아져 들어온 창구가 세비야였기 때문이다.


이후 세비야는 금으로 가득한 세비야 대성당과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를 보관해두었다는 황금의 탑 그리고 당시 세계 최대의 단일 건축물인 세비야 왕립 담배공장을 지으면서 명실상부 스페인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콜럼버스는 세비야의 <꿈>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세비야 대성당의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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