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집회 중 총학생회에서 연락이 왔다. 힘든 사람은 빨리 빠져나가라는 이야기였다. 곧 진압이 시작되니 잡혀가면 누구든 구속을 각오해야 한다는 소식이었다. 결정을 해야 했다.
누가 남고 누가 나갈 것인가?
남아 있으면 경찰에 끌려가 구속될 것이고 전과자로 평생 취직도 못하고 살아야 했다. 제일 믿음이 갔던 한 후배가 손을 들었다. 홀어머니 때문에 자신은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또 한 명이 같은 이유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둘을 보내고 남았다.
밤을 꼬박 세며 진압에 대비했지만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새벽이 되자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최루탄이 교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진압 경찰과 체포 경찰인 백골단이 교정을 순식간에 장악하며 우리들을 압박해왔다.
우리 모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리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극렬히 저항했던 덕분에 겨우 경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학생회와 경찰은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정오까지 학생들이 해산한다는 것을 전제로 봉쇄를 푼다는 협상을 타결했다. 24시간이 넘는 집회를 마치고 우리는 교문을 나섰다.
약속대로 전경들은 모두 철수해 교문 앞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평화로웠다. 우리 모두 기진맥진하며 식당을 찾고 있는데 어제 나간 두 친구들이 다가왔다.
둘이는 집에 못 가고 밤새 교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하나가 된 우리는 허기진 가슴과 배를 채우기 위해 인근 식당으로 갔다. 식당의 소주는 달고 깊었다.
광주시민 2천 명을 죽이고 군인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대학생으로 살고 있는 우리의 운명에 한 잔을 마셨고, 아무런 죄 없이 서로에게 배신의 감정을 가져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 또 한잔해야 했다.
새벽에 시작한 술자리는 정오가 지날 때까지 끝날 줄 몰랐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구속되었다.
나와 함께 구속된 사람들은 10명 가까이 되었다. 모두 집시법 위반이었다. 구속 생활은 힘들었다.
좁은 방에 일반인 재소자 7명과 함께 생활하며 화장실 청소 등 내가 맡은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사식이 들어오면 모두 둘러앉아 음식을 먹었다. 그나마 가장 즐거운 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스피커가 터져라 <전국 노래자랑>을 방송해준다.
송해 선생님이 <여러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전 사동의 재소자는 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소리친다. 송해 선생님은 항상 두 번 인사하신다. 두 번째 인사를 할 때면 재소자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재소자들에게 이 시간만이 유일하게 큰 소리를 내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이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한 명씩 옷을 벗고 사동 끝에 있는 목욕실을 향해 달려간다. 목욕시간은 1분이다. 목욕실에 들어서면 한 번의 샤워 물이 온몸을 강타한다. 비누로 머리와 몸을 30초간 문지르고 나면 두 번의 헹굼물을 몸에 끼얹어준다. 그러면 다시 방으로 뛰어와서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목욕을 끝낸다.
목욕 후 창으로 햇볕이 드는 날이면 목욕한 몸에서 나는 비누냄새로 기분 좋은 오후 한때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신체의 구속 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감옥에서 보낸 나는 어디든 마음껏 다닐 수 있는 자유가 그리웠다. 구속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다. 면회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위안이 되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변호사를 따로 한 명 더 선임했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나는 함께 구속된 9명과 함께 공동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그분이 문재인 변호사였다. 문재인 변호사는 당시 부산지역의 유일한 인권변호사로 부산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시국사건을 맡으셨다.
그런데 나는 실형이 나올 확률이 많다고 하여 따로 변호사를 한 분 더 선임했다고 부모님이 말씀하신다. 이는 함께 구속된 나머지 8명을 생각하면 비겁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차마 부모님에게 취소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만큼 부모님도 나를 너무 걱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앞으로 정치를 하면 안 되는 유약한 인간이었다.
다행히 9명 모두 집행유예로 90일 만에 풀려났다.
나는 학교를 복학하고 얼마 있지 않아 군대를 갔으며 그렇게 나의 20대 청춘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