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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Sep 15. 2020

부다페스트 여행 2

부다 지역

80m 높이의 고딕 양식의 첨탑과 세라믹 모자이크 지붕으로 아름다운 마차시 대성당의 원래 이름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었다.


마차시 코르비누스 왕이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두 번 올렸으며 그가 죽은 후 이 성당의 남쪽 탑에 그이 머리카락이 성체처럼 보존되어 있어 이 성당을 마차시 성당이라 부른다. 성당의 남쪽 탑에는 결혼반지를 물고 있는 까마귀가 앉아 있는데 코르비누스라는 말이 까마귀를 뜻하는 라틴어이다. 그래서 마차시 왕을 까마귀 왕이라 불렀다.



이후 마차시 성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었을 때 헝가리 왕을 겸한 합스부르크의 황제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가 대관식을 이 곳 성당에서 하였는데 당시 엘리자베트는 헝가리 전통의상을 입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기 1,000년경부터 시작된 헝가리 왕국은 15세기 무렵 중부 유럽의 핵심 국가로 성장한다. 특히 마차시 1세 왕이 통치하던 1458년에서 1490년까지의 기간은 유럽 전역에 르네상스 문화가 활짝 꽃을 피웠는데 헝가리 역시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보냈다.


마차시 1세는 오스만 튀르크와 싸워 헝가리의 국력을 가장 크게 키웠으며 유럽 어느 나라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일찍 받아들였다. 특히 그가 두 번째로 맞이한 왕비는 나폴리 왕국의 공주 베아트리체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대거 부다페스트로 불러들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가 부다페스트에 뿌리 깊게 내리게 하였다.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헝가리 왕국이 무너지면서 마차시 성당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서 마차시 성당은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내부 벽에 그려져 있던 프레스코화는 회칠하여 덮였고 성당의 비품들도 약탈당하였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17세기에 종결되었지만 이 성당이 본래 모습을 찾게 된 것은 19세기에 와서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다시 큰 피해를 입었고 전후에 복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의 큰 홀을 중심으로 정면에는 제단이 있고, 그리고 양 측면에는 아치형의 회랑이 쭉 늘어서 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을 때에는 회칠로 덮여 있었을 성당의 벽화들은 지금은 복원되어 제 모습을 찾았다.



이것은 12세기 헝가리 왕국의 왕이었던 벨라 3세와 그의 왕비의 무덤이다. 벨라 3세의 재위 기간에 헝가리는 정치문화적으로 발전하여 12세기의 여러 헝가리 왕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왕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신은 원래 세케슈페헤르바르의 바실리카에 묻혔으나 1862년에 그들의 뼈를 이곳으로 옮겨와 현재 이 곳에 있다.



이곳은 북쪽 안 쪽에 마련된 성 임레 예배당이다. 여기에는 헝가리 왕국의 앞에서 소개한 청동 기마상의 주인공인 성 이슈트반 1세와 멧돼지 사냥 중 사망하여 요절한 그의 아들 성 임레 그리고 왕비 기젤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예배당이었다.



성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 왕국을 성립시키고 기독교를 수용하여 헝가리를 서구 문화권으로 편입시키는 등 큰 업적들이 많아 그를 기리는 역사적인 기념물들이 여기저기 많다.



서쪽 구석진 곳에 마련된 조그마한 로레토 예배당에는 성모상이 서 있다. 마차시 성당은 성모상과 관련된 일화로도 유명하다.

부다페스트가 아직 오스만 제국 지배에 있던 168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격으로 신성 동맹 군대의 부다가 포위하게 되었다. 그때 신성 동맹 측의 대포에 의해 성당 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는데 그 속에서 예전부터 봉납되어 있던 성모상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모스크로 사용하여 이곳에서 기도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은 성모상을 보자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이는 부다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군의 사기 저하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부다가 함락되어 오스만 제국의 부다페스트 지배가 끝이 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마차시 성당의 뒤쪽에는 동화 속 요새처럼 어부의 요새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보는 도나우강과 페스트 지역의 풍경은 장관이다. 어부의 요새는 19세기 말 마차시 성당을 재건축한 슐렉이 성당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장식처럼 세운 것으로 헝가리의 여러 가지 역사를 담고 있다.


먼저 7개의 둥근 탑은 896년 도나우 강으로 이주해 온 마자르 족의 7 부족을 상징하고 원추형 지붕은 부족들의 천막을 형상화하였다. 이 곳이 어부의 요새라 불리는 이유는 19세기 어부들이 이 곳에서 적의 침입을 방어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어부의 요새 중앙에 헝가리 왕국의 초대 왕 성 이슈트반 기마상이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민족 대 이동이 시작되면서 여러 민족이 지금 헝가리의 땅인 판노니아 에 정착하였는데 그 가운데 마자르족이 있었다. 9세기 마자르족은 판노니아를 정복하였으며 오늘날 헝가리의 기원이 되는 나라를 세웠다. 이때 그들의 지도자는 아르파드 대공이었다.


970년 아르파드의 후계자 가운데 한 명인 게저의 아들 성 이슈트반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헝가리 최초의 국왕이 이 되었다. 이슈트반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서유럽을 모델로 중앙 집권적인 성당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1083년 그의 사후 그는 헝가리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매년 8월 20일은 이슈트반을 기리는 날이다.


어부의 요새에서 10분 거리에는 부다 왕궁이 있다.


도나우 강이 내려다 보이는 부다 언덕 위에 새워진 부다 왕궁은 새가 날개를 편 것 같은 형상이다. 부다 왕궁은 페스트 지역이 눈 아래 보이는 위치에 세워져 있으며 이 왕궁은 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곳은 현재 국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왕궁 오른쪽 입구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두 칼을 움켜쥔 커다란 새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바로 헝가리의 전설에 등장하는 투룰이다. 매과에 속하는 투룰은 마자르 인의 상징물이다.


마자르 족의 선조인 알모시의 어머니는 그를 잉태하고 태몽을 꾼다. 하늘에서 날아온 투룰 한 마리가 그녀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더니 그녀에게서 큰 샘이 솟아나고 샘은 서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샘물은 점점 불어나 눈 덮인 산을 넘고 건너편의 저지대로 흘러가 급류를 이루었다. 그곳에서 물이 멈추더니 황금가지가 있는 아름다운 나무가 물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태어날 아기가 훌륭한 왕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태어난 알모시는 헝가리 최초의 왕조인 아라파드의 선조로 헝가리 전역에 있는 투룰 상의 한쪽 발에는 언제나 왕의 칼이 쥐어져 있다.



부다 왕궁은 수 세기에 걸쳐 증축을 거듭한 것으로 지금의 형태로 굳어진 것은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이다. 헝가리가 겪어 온 영욕의 역사를 그대로 증언하는 부다 왕궁은 처음 세워진 이래 31차례나 포위를 당했다.


13세기 초에는 부다 지역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몽골족의 잦은 침입으로 방어가 쉬운 부다 언덕이 새로운 도읍지로 자리 잡았다. 1243년 헝가리의 왕 벨라 4세가 이 자리에 굳건한 성벽을 세웠다. 이후 40년이 지나서 고딕 양식으로 증축되어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요새가 되었다.


그리고 50년이 지나서 마차시 왕이 기존의 성이 너무 소박하고 작다고 하여 르네상스 양식으로 증축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유럽 전역에서 예술가와 장인들을 헝가리로 불러 모았다. 1541년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는 바람에 이 성채는 폐허가 되었으나 150년 지난 후 탁월한 군사 지도자인 오이겐 공이 1686년 9월 2일 부다페스트를 탈환함으로써 이 성도 되찾았다.


당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탈환하자 전 유럽은 기독교의 위대한 승리로 환호하였다. 이후 오이엔 공의 활약으로 젠타 전투를 승리하자 오스만 세력은 완전히 물러났으나 헝가리의 새로운 지배자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대체되었다. 부다 왕궁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더욱 확충되었으나 1810년 대화재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며 1849년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전쟁으로 더욱더 파괴되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고 나서 헝가리의 자치권이 강화되자 헝가리는 독립 왕궁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확장공사를 하여 2배의 규모로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1910년의 일이다. 하지만 이는 상징적인 것으로 부다 왕궁에는 1541년 이래 왕이 살지 않았다.


세계 2차 대전 말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 속에서 다시 한번 부다 왕궁은 폐허가 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50년에 복원을 하여 위엄스러웠던 지난날의 모습을 찾았다.



부다 왕궁의 한가운데에 있는 동상은 오이엔 공으로 동상 아래에는 1697년 9월 11일 젠타 전투 상황이 묘사되어 있으며 동상 주변에는 적군 포로의 형상이 장식되어 있다.


원래 이 기마상은 젠타 지역에 세우려고 만들었으나 재정이 없어 조각이 팽개쳐져 있었는데 당시 왕궁을 증축하던 건축가 하우스만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재정적 지원으로 이 기마상을 구입해 이 곳에 세웠다. 원래 이 자리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자리였다.


2차 세계 대전 후 왕궁을 복원하면서 헝가리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이 곳에 외세를 대변하는 외국인을 이 곳에 세울 것인가는 큰 고민거리였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기마상을 뒤로하고 성 벽으로 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이 곳에서 부다 바라보는 부다페스트의 전경이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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